▼유학안간 16세 국제콩쿠르 우승▼
1차 대회가 시작되었어요. 쇼팽 발라드 1번 등 네 곡을 쳤습니다. 정신이 없어 피아노를 누가 치는지 모를 지경이었어요. 출전자 중 외국 유학을 가지 않고 순전히 한국에서만 공부해서 나간 사람은 저 혼자였지요. 미국과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는 한국인이 몇 명 나왔더군요. 나이 제한이 32세까지인데 32세 남자 분도 나왔더군요. 저는 16세로 가장 어렸고…. 순국산으로 국제 콩쿠르에 출전한다는 것은 아직 상상하기 힘드는 일이래요. 이탈리아 독일 미국 일본 러시아 우크라이나 등지로부터 몰려온 58명의 경쟁자 중 18명이 2차 대회에 출전했어요.
2차에서는 멘델스존과 프로코피예프 등을 쳤는데, 그날은 잘 쳤어요. “피아노가 너를 안 따라주는 것은, 피아노를 덜 사랑하기 때문이다. 피아노를 더 사랑하면 너를 따라 줄 거다”란 말을 기억하면서 쳤어요. 그래서 그런지, 2차에서는 음악이 잘 만들어졌어요. 결국 여섯명이 남은 거예요.
3차, 4차가 남았는데 저하고 이탈리아 둘, 우크라이나 하나, 일본 하나, 러시아 하나 이렇게 여섯이었어요. 3차부터는 공개였어요. 저는 쇼팽의 ‘그랜드 폴로네즈’와 에튀드 25 전곡을 쳤어요. 그동안 친 것 중 가장 잘 쳤어요. 치면서도, “아, 잘 되네!” 싶었어요. 저는 다른 사람들이 치는 걸 듣고 싶었어요. 24세 이탈리아 남자가 치는 걸 들었어요. 경쟁력이 별로 없는 것 같았어요. 그 다음 우크라이나 여자가 슈만을 쳤는데, ‘그냥 잘 친다’ 정도였어요. 29세 이탈리아 남자가 치는 슈만은 정말 잘 쳤어요. 브람스도 잘 쳤지만, 슈만은 정말 잘 쳤어요. 24세 러시아 여자의 손은 잘 돌아갔으나 음악이 그저 그랬어요. 본선에는 16세인 저, 29세 이탈리아 남자, 24세 러시아 여자, 이렇게 셋이 뽑혔어요.
오후 8시부터 본선이 시작되었는데, 러시아 여자가 리스트 협주곡 1번을 쳤어요. 약간씩 삐끗했어요. “어, 저 애가 틀리지 않던데, 틀리네.” 그 다음 제가 들어갔어요. 쇼팽 협주곡 2번이었어요. 피아노가 말을 안 듣는 거예요. “피아노를 아무리 사랑해도 안 되네…” 하면서 쳤지요. 연주를 마쳤는데 지휘자가 너무 잘했다고 야단이었어요. “쇼팽 협주곡 2번 처음으로 친 거냐.” “그렇다.” “처음 치는 곡을 그렇게 잘 치다니. 다른 기회에 나와 또 협연하자.”
그 다음 이탈리아 남자가 들어갔는데, 처음 한 군데 삐끗하다가, 나중에는 정말 잘 쳤어요. “너무 잘 쳐서, 갑자기 슬픈 거예요.” 오후 10시반쯤 콩쿠르가 모두 끝났어요. 심사위원들이 정장을 하고 무대 위로 등장하는 거예요. 저희들 세 명도 무대에 올라갔지요. 이탈리아 말이라 알아들을 수 있어야지요. 이게 웬 일입니까. 1등 할 줄 알았던 이탈리아 남자가 먼저 3등상을 받지 않겠어요. 그 다음 러시아 여자가 앞으로 나가는 거예요. 남은 사람은 저 혼자였어요. 제가 1등이라는 거예요. 너무 놀라 정신이 없었어요. 정말 어이가 없었어요….
▼묵묵히 자기일만 해온 사람들▼
이 학생의 이름은 손열음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영재로 입학한 1학년생이다. 그는 유학을 간 일이 없다. 부모의 과잉보호도 받지 않았다. 혈혈 단신 이국만리에 가서 어린 나이에 역사와 전통이 깊은 세계무대에서 1등을 했다. 그를 키운 선생들은 말을 앞세우는 사람이 아니다. “유학가지 않아도 된다”라는 말을 무언으로 하면서, 묵묵히 자기 일만을 해온 사람들이다.
요즈음 세상은 정말 온통 어수선하다. 그러나 말없이 묵묵히 자기 일만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 숨어 있다. 손열음도 아직은 ‘숨은 꽃’이다. 그를 키운, 말없는 주변들도 숨어있는 귀한 옥토다. 손열음 이외에도 ‘숨은 꽃’은 찾으면 있다. 몰라서 그렇지 알기만 하면 이 세상이 마냥 깜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 같다.
이강숙 전 예술종합학교 총장·음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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