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권력의 요란한 등장▼
새삼 이 책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그 속에 담긴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개념 때문이다. 쿤은 모든 사회적 변화가 점진적이며 누적적이라고 하는 기존의 시각과 달리, 한 시대를 지배하는 일정한 사고의 범주인 패러다임은 어느 순간 급격한 전환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쿤의 주장은 이번 선거를 전후해 우리가 겪은 변화의 급격함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쿤의 말을 빌리자면, 이번 선거는 한국사회에 내재해 있던 변화의 에너지를 일순간 분출시키면서 기존의 패러다임을 해체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탄생시킨 ‘전환점’인 것이다.
이번 선거를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이해하는 주장들의 논점은 대체로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한국사회를 수십 년간 지배해 온 보수 지배체제가 붕괴하고 진보세력의 괄목할 만한 도약을 통해 보수-진보 양립체제가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번 선거의 결과에 따라 위기에 직면한 보수는 지금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스스로를 제대로 보수(補修)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진보와의 대결에서 승리할 가망이 없다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둘째의 주장은 한국사회가 2030세대의 등장과 함께 거대한 문화혁명을 겪고 있으며, 이에 따라 기존의 보수-진보 대립은 더 이상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이번 선거를 통해 가시화된 변화의 의미를 한국사회의 장기적 흐름 속에서 설명하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갑작스레 쏟아지는 요란한 진단들을 듣고 읽으면서, 슬그머니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드는 걸 발견하게 된다.
먼저 보수-진보의 구도를 생각해보자. 이번 선거에서 보수-진보의 대립 축을 지배한 것은 북한, 통일, 한미관계와 같은 쟁점들이었다. 반면 정치학 개론서에서 강조하는 자유와 평등, 국가의 역할 등에 대한 보수-진보간의 차이는 별 다른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점은 현재의 보수-진보 구도가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만일 보수-진보의 대립 축이 현재와 같이 대북 문제와 통일정책을 둘러싼 대립으로 굳어져 간다면, 그것을 우리는 과연 한국형 보수-진보 구도의 성립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진정한 의미의 보수-진보 구도는 상황적 요인에 의해 형성되지는 않는다. 이념의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양쪽이 각각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 또한 인간 이성에 대한 신중론과 낙관론에 대해 충분하고 일관된 신념을 갖출 때 비로소 우리는 보수-진보의 구도를 말할 수 있다.
▼세계주의와 조화 쉽지 않아▼
다음으로, 2030세대가 가져 온 새로운 정치가 활력과 희망을 의미한다는 평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386세대인 필자는 새로운 세대의 등장에 대해 기대와 부러움을 동시에 느낀다. 이들은 분명 우리 세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당당함과 자신감이라고 하는 귀중한 자산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자존, 자결의 민족주의 물결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 일면 자연스럽게 다가오지만 동시에 일말의 혼란도 느끼게 된다. 문화적으로는 이미 글로벌 문화의 네트워크에 깊숙이 젖어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의 촛불을 들고 있는 젊은 세대는 ‘세계주의’와 ‘열린 민족주의’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는 일이 간단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가 패러다임의 전환기에 서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거대한 전환기의 입구에 들어섰을 뿐이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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