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김기홍/˝쌀농사 계속 짓게 해줘요˝

  • 입력 2003년 1월 9일 18시 2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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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씨앗. 누군가 이런 말을 외친다면 2030세대는 그 표현의 촌스러움에 킥킥 웃을지 모른다. 하지만 4050세대는 70년대를 풍미한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노래를 아련히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연상도 이제는 틀렸다. 지난해 12월 한강 둔치에서 열린 농민대회에서는 “세계무역기구(WTO)가 눈물의 씨앗”이라고 정의해 버린 것이다.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었던 7만명의 농민들이 쌀과 농산물의 개방을 요구하는 WTO를 피눈물의 원흉으로 지목한 것이다.

▼´도하라운드´ 걱정에 멍든 農心▼

도하개발어젠다(DDA)라고 하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루과이라운드(UR) 후속편이라면 모두 머리를 끄덕일 것이다. “대통령직을 걸고 쌀시장 개방을 막겠다”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그 참담함을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 UR의 형님뻘 되는 DDA에서 농산물 시장개방의 연기가, 아니 큰불이 예고되고 있다. 참깨 녹두 등 관세율 500%가 넘는 농산물이 40개, 관세율 200%가 넘는 농산물이 100개가 넘는 한국이 그 관세율을 (미국 안이 채택되면) 25% 수준으로 낮추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쌀을 포함한 모든 농산물의 개방이다. 그러니 그 DDA를 진행하는 WTO가 어찌 우리 농민들의 가슴을 후벼파지 않을 수가 있는가.

WTO뿐인가? 아니다. 칠레와의 자유무역협정도 이들에게는 가슴을 아리게 하는 고통이다. 비록 그 직접적인 피해는 과수농가에 그칠지 모르나 그들이 채소류나 다른 특용작물 재배로 전업할 경우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듯이 다른 농민들 역시 어찌 아프지 않겠는가.

농민들의 그런 분노를 달래기 위해, 농산물 시장개방은 세계화의 대세이고 한국이 상품을 팔기 위해선 우리도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는 상투적인 사탕발림은 ‘분뇨세례를 받기 전에’ 그만두자.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농민들도 그 정도는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분노가 “평소에는 코빼기도 안보이다가 선거 때면 저 난리”라는 것과 “협상은 저것들끼리 해먹고…”라는 역겨움과 억울함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두들 선명히 기억한다. 쌀 개방 저지에 대통령직을 건 1992년의 김영삼씨와 농가부채 탕감을 약속한 1997년의 김대중씨를. 모두들 그 결과도 알고 있다. 쌀 시장은 시장대로 개방했고 농민들은 여전히 농가부채에 시달리고 있다. 이번에는 어떨까. “한국 농업을 반드시 살려내겠습니다”라는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의 육성이 아직도 생생하다. 과연 5년 뒤에는 한국 농업이 되살아나고 있을까. 무엇으로, 어떤 방법으로? 차라리 그런 공약(空約) 대신 “농업시장 개방을 막겠다고 장담할 수 없지만 이를 최소화하고 개방 전에 사전 사후대책을 확실하게 세우겠다”는 그의 뒤늦은 언급이 차라리 반갑다. 대책이라도 확실히 세우면 농민들이 도시의 노숙자나 빈민으로 전락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책만 세우는 것으론 부족하다. DDA에서, 자유무역협상에서 상대방이 어떤 농산물의 개방을 왜, 어느 정도로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지 농민들이 최소한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이 말은 정부부처가 정책간담회, 공청회를 열어 농민들에게 협상의 진행을 알리라는 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농민들의 의견과 견해가 협상전략과 대책에 반영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라는 것이다. 가령 대통령직인수위 앞에서 진행되는 1인 시위까지도 협상전략 수립에 활용될 수 있는 그런 시스템 말이다.

▼농민의견 협상에 반영해야▼

한강이 얼어붙었다지만 조금만 있으면 농사철이 시작된다. 그러나 그 3월이 농민들에게는 반갑지 않다. DDA에서 농산물 시장개방 폭이 결정되는 때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농사는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새로운 대한민국’에서 이들의 분노가 조금은 줄어들 수 있을까. “우리는 더도 아니고 지금처럼 쌀농사를 짓게 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다”는 어느 농민의 말이 엄동설한의 날씨처럼 가슴을 파고든다.

김기홍 산업연구원 연구위원·객원논설위원 gkim@kiet.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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