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사태는 우리 국민 의식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민족주의 감정과 직결되어 있다. 지구촌시대에는 민족주의가 국제사회의 경계 대상이 되고 있지만 아직 한국에서는 그 영향력이 막강하다. 한국민족주의는 일제강점기 때는 독립정신을 고취한 원동력이었고 분단 이후에는 민족통일국가를 지향하는 뜨거운 열정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반도가 일본에 병합된 20세기 초부터 계산해도 이미 1세기 이상 우리 민족의 의식과 생존양식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이다.
▼반미…친미…국민분열 커져▼
그런데 한국민족주의는 근년 들어 뒤틀린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나 광복 직후에는 ‘민족세력’ 또는 ‘민족진영’ 하면 당연히 우파세력을 지칭했다. 자신이 우파였던 백범 김구는 “일부 좌익의 무리가 민족주의라면 마치 진리권(眞理圈)에서 떨어진 생각인 것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좌익진영이 소련의 지령을 받고 하루아침에 신탁통치 반대에서 찬성으로 돌아서자 그들은 여지없이 반민족세력으로 낙인 찍히고 민족적 정통성과 주도권은 우파세력에 있다는 인식이 일반화됐다.
남북대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적으로는 권위주의 통치를 했지만 ‘민족중흥’이라는 기치 아래 ‘한강의 기적’을 이룩해 북측을 경제적으로 압도함으로써 체제우월성과 민족적 정통성을 과시했다. 동서냉전이 끝나고 한반도에도 긴장완화 기운이 돈 90년대에 들어와서는 우리 정부가 ‘한민족(韓民族)공동체 통일방안’이라는 것을 제시해 우리 민족의 통일국가 비전을 밝혔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북한정권이 ‘민족주의 세력’이고 우리측이 ‘사대주의 세력’인 것처럼 말하는 경향이 생겨났다. 그것은 북한정권이 주체사상과 민족대단결 원칙을 바탕으로 단군릉까지 만들어 집요한 민족주의 공세를 벌인 데도 원인이 있지만 우리 자신의 책임이 더 크다. 80년대부터 나타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좌파적 현대사 재해석과 친일 시비 및 광주 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빚어진 반미감정 고취 등이 그것이다. 남한 정권은 민족자주성이 없는 친일·친미정권으로 매도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이 초래한 대북인식의 왜곡과 경계심 실종, 그리고 황장엽씨의 활동 차단 등 북한 비판 여론의 봉쇄로 일반 국민을 거의 ‘북맹(北盲)’으로 만든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에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의 불평등 문제가 부각되어 더욱 사태가 악화되었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세계가 찬양하는 경제적 번영과 민주화를 이룩해 한국민족주의의 정통성을 확보하고도 오히려 밀리는 기막힌 상황을 초래했다. 수백만 인민들을 굶기고 자유와 인권을 말살하는 독재체제가 오히려 민족적 정통성을 차지한 것처럼 되었으니 말이다.
▼‘北核 민족공조’ 정당화 안돼▼
민족주의는 양날의 칼과 같다. 민족주의가 잘못되면 다른 민족을 배척하고 핍박하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자기민족 중심의 위험한 민족주의로 변질한다. 민족주의는 또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와 인권을 유린하는 비민주적 정치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악용되기도 했었다. 그 최악의 예가 나치즘이다. 동족에게 총을 겨누고 보편적인 인간의 기본권을 짓밟는 체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민족주의를 다른 모든 가치보다 우월한, 절대적 이념으로 삼는 민족지상주의는 위험한 생각이다. 북한의 핵 개발은 민족공조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는 앞으로 최대한 자주성을 살리면서 개방적인 민족주의와 국제협조원칙에 입각한 새로운 한반도평화 전략을 마련해 한국민족주의를 제자리에 복귀시켜야 한다.
남시욱 언론인·성균관대 겸임교수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