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유종호/첫번째 시험 '의혹 밝히기'

  • 입력 2003년 1월 26일 18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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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무슨 재미로 살아야 할지 맥이 풀리네요.” 월드컵이 끝난 직후 동네 문구점에 들렀을 때 젊은 주인이 하는 말이었다. 경기가 개막되기 이전에는 솔직히 너무 법석을 떠는 게 아니냐 하는 느낌이었다.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가 와서 축하해 준다는 소식에 ‘좌파’치고는 별난 짓을 다 한다는 생각도 했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활용하는 집단적 몰입(沒入)의 홍보에 정통 좌파를 자처하는 인사가 끼어드는 것도 웃기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막상 경기가 개막되자 TV 앞에 죽치고 앉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선수들의 선전 때문이었다. 흉보고 욕하면서 닮아간 셈이다. 그러나 폐막될 때는 법석이 끝나 시원하다는 느낌이었다. 자연 동네 문구점 주인의 말은 젊음 탓이라고 치부하고 “너무 열 올린 탓이겠지요”라고 받아넘겼다.

▼화려한 약속보다 상식 실천을▼

“정말이지 맥 빠져서 기운이 안 나네요.” 대선이 끝난 후 승강기에서 마주친 이웃집 사람이 건넨 말이다. 평소 가벼운 인사나 주고받는 처지였는데 어지간히 적막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법석이 끝나 시원하다는 느낌은 덮어두고 “우린 노약자가 아닙니까”라고만 대꾸했다.

두 차례의 큰 행사가 사람들에게 질적으로 다른 잔치 끝의 적막감 혹은 허탈감을 안겨준 것 같다. 들뜬 잔치 기분이 오래 지속되는 것은 좋지 않다. 평상심으로 돌아와 각자의 볼일을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그게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새 대통령당선자에게 유난히 요망사항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라 생각한다. 난생 처음 연하의 대통령을 맞게 된 우리 또래의 감회는 각별한 데가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것은 속없는 짓이다. 역사상 단기간 내에 정치공동체 삶의 질을 형편없이 구겨놓은 집권자나 지도자는 수두룩하다. 그 반대되는 사례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과도한 기대는 환멸의 어머니다. 그래서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새 대통령당선자의 평범한 말에 호감이 가고 기대를 걸게 된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또 바라서도 안 된다. 동서고금의 문학작품들은 화려한 약속을 많이 하는 사내일수록 요주의 인물이라는 메시지로 가득 차 있다. 또 그런 사내에게 팔 벌리고 달려가 욕보는 한심한 여성들로 꽉꽉 차 있다. 당사자에게는 비극이지만 제3자에겐 인과응보의 예정된 희극일 뿐이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건실한 발언도 이러한 사실의 통찰에 기초한 것이라 생각한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로 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엄청난 비상식의 악순환을 끊는 일이다. 벌써 오래 전 박종철군 사건이 발생했을 때 고문치사 의혹 제기에 대해 소관 부처의 한 책임자는 “그런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고, 있지도 않았다”고 극구 부인했다. 멋진 수사(修辭)였고 한동안 자주 활용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은 맹랑한 거짓임이 드러났고 국민적 분노를 자아냈다.

지금도 엄청난 비상식의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4000억원을 송금했다느니, 도청을 한다느니, 공적자금이 어떻다느니 하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사안의 성질이나 액수의 규모로 보아 엄청난 비상식의 사례다. 자다가도 기절초풍할 일이다. 그런가하면 국정 최고책임자의 종용으로 출국한 것이라는 어느 재벌 총수의 해외 인터뷰 보도가 국민을 쉴새없이 피곤하게 만들고 있다. 공식적인 반응은 현재까지 부인 일변도다. 그 말을 믿고 싶다. 그러나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고, 있지도 않았다”는 공식 반응에 속아본 국민은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부인만 하는 공식발표 없어야▼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국제적인 현안을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패의 유혹에 허약한 국민을 삽시간에 청교도로 개종시킬 수도 없다. 그러나 큰 의혹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은 가능하다. 처벌이 목적이 아니다. 컴컴한 비상식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경각심을 일으켜 상식이 통하는 투명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새 정부는 국민이 부과한 첫 번째 시험에서 좋은 성적 올리기를 간곡히 바란다.

유종호 연세대 특임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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