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노선 갈등 개연성▼
노 당선자의 안정 쪽 노력이 대표적으로 드러난 것이 새 정부 초대 총리로 고건(高建)씨를 택한 것이다. 당선자 스스로 ‘개혁 대통령’ ‘안정 총리’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다. 그렇다면 당선자가 ‘안정 총리’라고 규정한 의도는 무엇일까. 자칫 개혁으로만 쏠릴 경우 야기될 불안감을 희석시킬 안전판을 만들어 두자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노 당선자의 개혁성향을 불안해하면서 대선에서 반대표를 던진 만만치 않은 세력에 대한 ‘교두보 역할’을 기대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가능하다. 현실감각이 뛰어나다는 노 당선자로서는 외면할 수 없는 선택일 수 있다. 장관 인선에 사회 원로의 추천을 언급한 것도 같은 뜻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다. 개혁과 안정은 함께 가기가 대단히 어려운 명제이기 때문이다. 개혁으로 파헤치고 안정으로 뒷마무리를 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 않는가. 지난 정권에서 한번 시도된 개혁작업이 이익집단 사이에서 얼마나 깊은 갈등을 만들어 냈는지 여러 번 보았다. 그렇다고 노 당선자로서는 지난 일들이 어려웠다고 손을 놓을 수만도 없는 상황이다. 낡은 정치를 확 바꿔 보겠다고 공언한 그의 개혁성에 지지를 보냈던 많은 사람을 실망시킬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자칫 지지세력 안에서 정책노선에 대한 갈등이 빚어질 수도 있다.
누가 뭐래도 우리 길을 가겠다는 외곬의 결심이 아니라면 노 당선자와 핵심 측근들은 선거기간 중 개혁 못지않게 자주 내세웠던 ‘국민통합’이란 명제를 되살리기를 바란다. 개혁과 안정이 상충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통합에 기여하는 것인지, 어떤 것이 통합을 저해하는지를 헤아려야 한다는 의미다. 국민통합을 그르친다면 어떤 정책이라도 합목적성을 잃게 마련이다. 개혁이 통합을 앞설 수는 없다. 노 당선자 스스로 대선 후 사회적 골이 얼마나 깊어지고 있고, 따라서 통합이 얼마나 시급한 과제인 줄 더 잘 알 것이다. 더욱이 정치적 지지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할 때 분열은 치명상이 될 수 있다.
‘개혁’, ‘안정’ 하지만 실은 관념적인 것이고 문제는 구체적 정책으로 어떻게 나타내느냐이다. 결국 얼마나 정교한 개혁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우선순위를 매기고 단계별로 정치(精緻)한 시간표를 작성해야 한다는 등 의견도 많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사람이다. 새 정부 핵심진용을 어떻게 짜느냐의 문제다. 과거의 실패는 정책 내용이 나빠서라기보다는 정책추진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경우가 많다. 명분 있는 개혁정책이라도 기본계획에서부터 틈이 생기면 한 발짝을 떼기가 어려운 법이다.
▼‘사람’이 열쇠다▼
여기서 시스템이란 바로 사람이다. 노무현 정권의 출범 내각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이래라 저래라 할 입장은 아니지만 대선 승리의 논공행상 쪽으로만 흘러서는 곤란하다. 선거운동과 국정운영은 분명히 구분지어야 하고 몰려든 이력서를 잘못 처리했다가는 국가운영을 심각한 난조에 빠뜨릴 수 있다. 그렇다고 명망가만 모셔 올 일도 아니다. 그 직책이 어떤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 자리인지를 먼저 명확히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 노 당선자 스스로 개혁과 안정을 함께 시험대에 올렸다. 밖에서 보는 것과 청와대 안에서 보는 바깥은 분명히 다르다.
최규철 논설주간 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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