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당시 국가정보원장으로 남북 밀실거래에서 주역을 했던 임동원 현 대통령통일외교안보특보는 이번 특사 자격의 방북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지도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왔다. 남북관계사에서 기록될 참으로 창피한 사건이다. 임 특사 일행 중에는 새 정부를 이끌 노무현 대통령당선자측 인사도 포함돼 있었다. 따라서 김 위원장의 특사 홀대는 현 정부와 차기 정부 모두에 비례(非禮)를 범한 것으로 우리 국민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다. 이 같은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은 재고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첫째, 대통령 특사 일행이 북한에서 받은 푸대접은 DJ 정부가 대표적 치적의 하나로 내세워온 햇볕정책이 과연 어떤 실질적 업적을 거두었느냐를 생각해 보게 한다. 대북 포용정책의 결과 남북간에는 상호존중과 화해 및 신뢰가 정착됐다고 주장해온 DJ정부는 밀실지원으로 확인된 것 만 해도 2240억원에 이르는 퍼주기에도 불구하고 임 특사가 문전박대를 받은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둘째, 우리 정부의 특사 파견과 관련된 정책결정도 비난받을 만하다. 특사와 김 위원장과의 면담이 사전에 합의됐느냐의 문제다. 만일 과거 밀실지원 사실이나 관례 등에 비추어 면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낙관이 작용했다면 무책임한 정책결정이었다. 더구나 핵문제가 새롭게 불거진 이후 북한의 강경 정책노선을 신중히 읽지 못했음을 뜻한다.
셋째, 북한의 핵문제가 북-미간 핵심 현안으로 등장한 가운데 현 정부와 노 대통령당선자는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한국이 북-미간 ‘중재역할’과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뭣 주고 뺨 맞는 식’의 오늘날 남북관계에서 우리가 자임하고 나선 ‘중재역’이나 ‘주도적 역할’은 한낱 환상에 가까운 일이라는 점이 증명된 셈이다. 특히 미국은 이제 북핵 문제를 다룰 때 남한 정부를 통하지 않고 북-미간 직접협상으로 나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것은 북한이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북한은 지금 북-미관계 개선, 체제보장, 불가침조약 등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에 핵 개발이라는 극단적 카드를 들이대면서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한편 미국은 “핵 포기 없이는 대화도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북한을 ‘무법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결국 이번 특사 망신은 북한 핵 문제를 푸는 데 우리의 ‘중재역’도, ‘주도적 역할’도 기대할 수 없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해 보인 것이다. 주도적 역할은커녕 향후 한미공조에 공연히 긁어 부스럼만 낸 꼴이 됐다.
넷째, 특사를 냉대한 북한 자신에도 창피한 일이다. 남북 양측의 특사방문 공식 발표는 비상한 국제적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북한은 특사 면담이란 국제 관례마저 무시함으로써 남북간은 물론 국제사회 전반과의 신뢰 형성도 어렵게 했다.
다섯째, 우리 정부가 왜 하필 이 시점에서 특사 파견을 서둘렀느냐 하는 점이다. 그 동안 초강경 카드를 구사해온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정밀 분석했어야 했다. 이 문제는 새 정부가 출범해 한미공조의 틀 안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 사려 깊은 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 정부와 노 당선자측은 서둘러 특사를 파견함으로써 마치 ‘바보들의 행진’ 같은 국제적 망신만 초래했다. 또한 대북 밀실지원설을 희석시키기 위한 시도의 일환은 아니었나 하는 의혹까지 사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번 대북 밀실지원 확인과 특사 망신은 햇볕정책, 북한 체제의 본질, 우리의 대북정책 결정과정, 북한 핵 문제 해결과 관련된 우리의 역할 설정 등 대북 정책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철저한 반성이 있어야 함을 일깨워 주고 있다. 정부가 혹 민족 공조의 감상주의나 밀실 접근으로 북한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만저만 위험한 발상이 아닌 것이다.
안영섭 명지대 교수·북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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