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는 어느 프랑스 교수의 말이다. 이분은 가끔 나를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우리 문화재에 대해 아는 것이 많다. 등산을 할 때 어떤 종교인은 사찰을 피해 돌아간다는 말을 하면서 ‘한국인이 문화재를 사랑하는지 의문’이라는 말도 내게 들려주었다.
이왕 봉덕사종 종소리 이야기가 나왔으니, 몇 년 전 가야금의 대가 황병기 교수가 들려 준 이야기가 기억에 새롭다. 일본에서 세계 각국의 음악인들이 모여 세계 각국의 종소리를 감상하는 모임이 있었다 한다. 그때 봉덕사종 종소리를 들은 후 음악인들은 더 이상 다른 소리는 듣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모임을 끝냈다고 한다.
▼삼류 유흥지 같은 왕릉 주변▼
봉덕사종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종은 그 구조가 서양 것은 물론이고 중국이나 일본 종과도 다르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걸개 옆에 하늘을 향해 음관이 있고 종 아래 땅에 울림통을 둔 것이 그것이다. 아마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함께 소리를 만드는 악기가 한국 종일 것이다.
사람의 정신병을 치료하는 데 특효가 있는 것이 어디 종소리뿐이겠는가. 창덕궁 주합루 근처나 경복궁 향원정 일대에서 느끼는 편안함은 정신치료약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은 모두 없어졌지만 원래 창덕궁과 창경궁 안에는 16채의 초가가 있었다. 임금님이 초가에서도 휴식을 취했던 것이다. 기와로 지은 전당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발을 뻗기 어려울 정도로 방들이 작다. 우리 궁궐은 이렇듯 위압적이지 않아서 더욱 편안하게 느껴진다.
서울 주변과 경기도에는 왕릉과 후궁의 능들이 즐비하다. 풍수가 좋고 수림이 울창해 그야말로 명당들이다. 이 능원들은 역사의 숨결을 담고 있는 귀중한 문화재일 뿐만 아니라 시민휴식공간으로서, 도시의 공기를 정화시키는 환경의 차원에서도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지 그 가치를 헤아리기 어렵다.
그런데 소중한 문화재 옆일수록 고층건물을 지어 조망권을 독점하고, 큰길을 뚫어 문화재를 망치고, 환경을 파괴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요즘 내가 소속되어 있는 문화재위원회에서 심의하는 일은 거의 대부분 이런 일들뿐이니 과연 우리가 문화국가인지, 한숨만 나온다.
지금 창덕궁과 종묘의 담장 밖을 가보면 궁의 담을 개인 담으로 이용하는 집들이 허다하다. 이것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의 현장이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황제릉이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홍릉과 유릉이다. 그 능 앞에는 우람한 예식장이 능을 가로막고 중고차판매점이 만국기를 요란하게 걸어놓고 성업 중이다.
경기 구리시 동구릉은 태조 이성계를 비롯해 아홉 왕릉이 있다 하여 구릉이라 한다. 그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왕릉지역이다. 그런데 그 입구를 가보면 골프연습장이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고 지저분한 음식점이 난립해 마치 삼류 유흥지에 온 것 같다.
귀중한 문화재가 파괴되고 홀대받고 있는 현장을 말하자면 한이 없다. 그 책임을 따지자면 단기적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업자와 시민, 그리고 선거를 의식한 지방자치단체에도 문제가 있지만 사적지의 땅을 민간에 불하한 정부 당국에 더 큰 책임이 있다. 개인소유지가 된 땅을 이제 와서 문화재보호법으로 규제하자니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나라가 가난하던 시절에 문화부 직원들의 봉급을 주기 어려워 사적지를 매각했다고 하니 이해는 가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물려받은 유적 보존도 못하나▼
지금 전국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부와 개인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길은 정부가 다시 땅을 사들이는 수밖에 없다. 씨를 뿌린 측이 거두어야 한다. 물론 예산이 문제이지만 만약 이런 추세를 그대로 둔다면 전국의 사적지 주변은 아파트와 공장과 음식점으로 완전히 뒤덮일 것이다.
21세기가 문화의 시대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면서 왜 문화비전이 보이지 않는지 안타깝다. 광개토대왕은 만주를 다 차지했으나 지금 모두 잃었다. 신라도 없어졌으나 봉덕사종은 저렇게 인간의 정신을 치료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문화의 힘은 위대한 것이다.
한영우 서울대 교수·한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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