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세상]이인식/누구나 사이보그 될 수 있다

  • 입력 2003년 2월 7일 18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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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0월 22일 베리칩에 대해 미국 식품의약국이 내린 뜻밖의 결정은 사이보그 사회가 성큼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한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960년 등장한 낱말인 사이보그는 기계와 유기체의 합성물을 의미한다. 생물체에 기계가 결합되면 그것이 사람이건 바퀴벌레이건 사이보그라 부른다. 사람만이 사이보그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이보그는 오랫동안 주로 ‘600만달러의 사나이’나 ‘터미네이터’와 같은 공상과학영화의 주인공을 묘사하는 단어로 사용돼 왔을 따름이다. 그러나 1985년 미국의 페미니스트인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를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사이보그를 성차별 사회를 극복하는 사회정치적 상징으로 제시했다. 이를 계기로 사이보그는 공상과학의 세계에서 뛰어나와 현실적 존재로 부각되었다.

▼사람-기계 경계 서서히 붕괴▼

사이보그는 종류가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유기체를 기술적으로 변형시킨 것은 모두 사이보그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가령 1996년 휠체어를 타고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에 나타나 재활 의지를 과시한 영화 ‘슈퍼맨’의 크리스토퍼 리브, 1998년 세계 최초로 로봇팔 이식수술을 받은 영국의 장애인, 유전공학과 의학기술로 심신의 기능을 개선시킨 사람들, 이를테면 인공장기를 갖거나 신경보철을 한 사람, 예방접종을 하거나 향정신성 약품을 복용한 사람들도 기술적 의미에서 사이보그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 천연두 예방주사를 맞은 어린애부터 틀니를 한 노인네까지 우리 주변에서 사이보그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21세기에는 정보기술과 생명공학이 발달할수록 생물체가 사이보그로 바뀌어 가는 현상이 가속화하면서 사람과 기계의 경계가 서서히 허물어질 것이다.

베리칩은 지난해 미국의 어플라이드 디지털 솔루션스(www.adsx.com)가 선보인 컴퓨터 칩이다. 길이 12㎜, 너비 2.1㎜로 크기가 쌀 한 톨만해서 보통 주사기를 사용해 간단히 팔의 피부 밑에 이식할 수 있다.

베리칩은 실리콘 메모리와 무선 송수신 장치로 구성돼 있으며, 스캐너로 칩 안에 저장된 정보를 판독해 외부로 전송할 수 있다. 칩의 삽입 비용은 200달러 선이다. 베리칩의 수명은 20년 정도.

베리칩에는 칩을 이식한 사람의 신원과 질병 이력에 관한 자료가 담겨 있다. 따라서 응급 상황, 이를테면 환자가 의식을 잃은 경우 의사들은 베리칩에 저장된 정보를 읽어내서 환자의 이름, 전화번호, 질병 기록 따위를 신속히 파악할 수 있다.

작년 5월 베리칩을 최초로 이식해 ‘칩 가족’이라는 별명이 붙은 미국 플로리다주의 제이콥스 가족들은 베리칩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다. 열네 살 된 아들이 부모를 설득한 끝에 일가족 3명 모두 베리칩을 이식한 까닭은 중병에 시달리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갔을 때 의사에게 자신의 질병을 설명하지 못해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제이콥스 가족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사이보그 가족이 된 셈이다.

어플라이드 디지털 솔루션스측은 몇 년 안에 베리칩에 인체의 건강 상태를 알려주는 체온 혈압 혈당 등을 감지하는 센서를 부착할 예정이다. 또한 지구 위치파악시스템(GPS)과 연결해 개인의 행방을 추적하는 기능도 추가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해 10월 미국 식품의약국이 베리칩에 대해 조건부 규제를 발표함에 따라 기대와 우려의 목소리가 교차하고 있다. 베리칩이 신원 확인과 안전에 사용될 경우에는 식품의약국의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결정된 것이다. 다시 말해 베리칩이 인체에 이식되는 장치임에도 불구하고 의학적 용도가 아니면 식품의약국의 규제를 받지 않게 됨으로써 베리칩의 대중화가 급속도로 진행될 전망이다.

▼베리칩 이식 문의전화 쇄도▼

베리칩을 이식한 사람은 아직 10여 명에 불과하지만 칩 이식을 문의하는 전화가 쇄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또한 유럽, 남미, 중국 등에 베리칩 판매조직이 구축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조만간 상륙할 가능성이 높다.

베리칩의 대량 보급을 앞두고 다양한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 브라질처럼 유괴 범죄가 빈발하는 나라에서는 부자와 권력층에게 베리칩을 이식해두면 범인 추적이 용이할 것이라고 크게 반색한다. 그러나 인권운동가들은 베리칩의 오용 가능성을 벌써부터 걱정하고 있다. 성폭력 상습범 등 전과자들에게 베리칩을 강제로 이식해 행동을 감시하거나, 기업체와 정부기관에서 종업원에게 베리칩 사용을 권장하면 인권 침해의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이인식 과학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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