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박성희/‘대통령 謝過’ 없는 나라를

  • 입력 2003년 2월 25일 19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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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언변이 좋다.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의 수습이 자신의 몫임을 내다본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고 국민에게 죄인 된 심정으로 사후 대처하겠다”고 했다. 여기서 ‘죄인’이라는 단어는 한국인의 정서를 정확히 간파한 탁월한 선택이었다.

반드시 자신이 지은 죄가 아니라도 사죄(謝罪)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정서다. 아들의 잘못을 아버지가 대신해, 부하 직원의 잘못을 윗사람이 대신해 참회하고 책임지는 ‘대리 사과’가 우리 사회에서는 보편화돼 있다. 옛날 왕은 심지어 비가 오지 않거나 많이 와도 자신이 부덕한 탓으로 돌렸다. 사과(謝過)는 또 요즘 시쳇말로 다소 ‘오버’해야 진심처럼 받아들여진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하더라도 잘못한 만큼만 사과해서는 용서받기 힘들다. “요것은 잘했고 조것은 잘못했으니 70%만 사과하겠다”는 식의 부분 사과는 용서받기 힘든 망언이기 일쑤다. “죽을 죄를 지었다”거나 심지어 “죽여달라”고 해야 너그럽게 용서받을 수 있다.

이런 우리 식 사과를 서양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법적 책임을 수반하는 사과와 그렇지 않은 사과, 단순한 유감과 심심한 유감 등 다양한 등급을 매겨 놓고 정교하게 계산된 양과 질의 사과를 한다. 수사학에서 각종 사과를 통칭하는 ‘어폴로지아’라는 장르가 일찍이 자기를 방어하는 치밀한 화술로 자리매김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반면 우리는 상대방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덮어놓고 사과하고 보는 때가 많다. 우리의 사과는 죄의 경중을 가리기 위한 치열한 논리싸움이라기보다는 사태 수습을 겨냥한 레토릭 쪽에 더 가깝다.

이런 정서는 대체로 동양 삼국이 공유하는 것 같다. 중국어에서 사과를 나타내는 말은 ‘다오첸(道謙)’과 ‘바오첸(抱謙)’ 두 가지다. 전자는 ‘말로 하는 사과’, 후자는 ‘손을 감싸고 행동으로 보이는 사과’라는 어감상의 차이가 있으나 둘 다 법적 책임과는 무관하다. 일본어의 ‘스마나이’라는 말엔 ‘이대로는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의 빚이 탕감되지 않습니다’라는 막연한 겸양이 포함되어 있다.

‘왜 일본인은 빨리 사과하는가’라는 책을 쓴 사와타 요타로는 “상대방의 기분을 손상시켜서는 안 되니 우선 사죄부터 해놓고 구체적 해결은 여유를 갖고 해나가자고 생각하는 일본식 교섭방법이 국제사회에서 일본을 결정적 패배에 빠뜨린 첫걸음”이라고 경고했는데, 동서양 커뮤니케이션 문화의 차이에 주목한 그의 말은 우리도 새겨들을 부분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대통령의 사과를 많이 받은 기억을 갖고 있다. 그만큼 여론이 들끓은 일이 잦았다는 반증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재임시 여섯 번 사과했다. 역설적이지만 사과의 ‘탕감효과’에 힘입어 그는 임기를 채울 수 있었다. 미국의 대통령이라면 사과와 동시에 사임해야 한다. 그게 그네들의 사회 정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과문은 가장 ‘오버’한 사과문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못난 노태우’로 스스로를 지칭한 사과문에는 “어떠한 돌팔매도 기꺼이 감수하겠다” “속죄의 길이라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절절한 참회의 말들이 넘쳐 흘렀다. 그가 만약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체통을 고집했더라면 그의 사과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당시 국민의 노여움은 컸었다.

생각해보면 가장 사과에 인색했던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그는 가급적 직접 나서지 않고 대변인을 통해 사과의 뜻을 전하거나, 사과의 내용조차 ‘아들 주변 인물’의 탓으로 돌리는 등 영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사과로 일관했다. 가장 마지막의 담화문도 “죄송하다”고 했으니 사과는 사과인데, “(대북 비밀송금은)나라를 위해서 했다”고 토를 달아 도무지 잘했다는 건지 못했다는 건지 헷갈리게 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과만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그는 머리로만 사과했다.

어제 새 대통령이 취임했다. 마음에서 나왔건 머리에서 나왔건, 대통령의 사과는 이제 그만 듣고 싶다. 아무리 언변 좋은 이가 “잘못했습니다, 잘못했고요”라고 해도 대통령이 사과해야만 하는 나라의 모양이 어떤 것인지 거듭된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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