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서울국제마라톤을 보고]정이현/그래, 살아있으므로 달린다

  • 입력 2003년 3월 16일 18시 40분


가끔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뛰는 것말고는 달리기와 아무 상관없는 매일을 살아가는, 나는 일개 서울시민이다. 십여년 전 대입 체력장에서 800m를 달리고 뻗어버린 깜냥엔 42.195㎞의 거리를 시간당 20㎞에 가까운 속도로 역주하는 마라토너란 감히 범접조차 하지 못할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마라톤 중계를 볼 때마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도 등 떠밀지 않는데, 저토록 고통스러운 표정인데, 왜? 언젠가 ‘진짜 마라토너’를 만난다면 꼭 물어보고 싶었다. 도대체 당신은 왜, 달리나요.

▼봄비 속 한바탕 축제 마당 ▼

2003년 3월 16일 이른 봄날 아침, 나는 드디어 생애 처음 수천명의 마라토너들을 코앞에서 지켜보게 되었다. 스타트라인에 서서 카운트를 기다리는 그들은 그러나 내가 지레 짐작해 온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곧 닥칠 육체적 괴로움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온몸으로 비장미를 발산하는 러너(runner)는 어디에도 없었다. 광화문, 지난 유월 저 놀라운 월드컵 체험 이후 한국인에게 더 이상 단순한 지명(地名)이 아닌 그 ‘광장’에서 내가 목도한 것은 바로 ‘인간’의 모습이었다. 워밍업과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근육을 푸는 100여명의 엘리트 선수들 뒤로 물결을 이루어 길게 늘어선 8195명의 마스터스 선수들. 그들은 마치 오래 기다려온 카니발에 참가한 듯했다. 색색의 옷을 맞춰 입은 동호회 회원들, 흰 수염을 멋스럽게 늘어뜨린 할아버지, ‘현정아, 사랑해’ 라고 쓴 티셔츠를 입은 채 연방 V자를 그려대는 청년, 응원 나온 딸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이는 아주머니까지. 달리기 위해 일상을 조이고, 일상을 조이기 위해 달리기를 해온 소박한 사람들은 동아서울국제마라톤대회를 축제의 마당으로 진정 즐기고 있었다.

레이스가 초반을 지날 무렵 아스팔트 위에 갑자기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봄비였다. 선수들의 체감온도는 급격히 낮아지기 시작했을 터였다. 레이스 앞에서는 이미 본격적인 선두그룹이 형성되고 있었다. 한국의 지영준 선수가 아프리카의 거트 타이스, 지미 무인디 등의 유명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좋은 페이스를 보이는 중이었다. 마지막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역전, 재역전을 거쳐 결국 남아공의 노장 거트 타이스 선수가 지영준 선수를 앞서 피니시라인을 끊었다. 불과 어깨 하나 차이였다. 지영준 선수는 그 먼 거리를 달려 자신의 최고기록을 새로 쓰고도 스물 두 살 청년의 담담하고 맑은 눈빛을 잃지 않았다. 초록 월계관을 머리에 얹고 환호에 답하는 우승자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는 문득 아까 출발선에서 만난 이름 모를 시민들을 떠올렸다.

서울의 실핏줄을 따라 묵묵히, 쉼 없이, 한발한발 내딛고 있을 그들. 길은 앞으로만, 그리고 안으로만 이어져 있다. 뒤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제가 거쳐온 길을 스스로 지우며, 제가 나아갈 길을 스스로 만들며 달리는 길. 몰입, 그리하여 마침내 도달하는 고요한 순간! “그토록 힘든데 왜 달리나요?” 그것이 얼마나 건방진 물음이었는지 이제야 나는 소스라치며 깨닫는다. 그래, 살아있으므로 우리는 달린다.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김명인 시집 ‘길의 침묵·문학과지성사·1999’에서)

42.195㎞를 지나 무사히 귀환한 러너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경의를 표한다. 안타깝게 레이스를 마감하지 못한 다른 참가자들에게는 따뜻한 격려의 박수와 함께 이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아름다운 몰입’에 감동 ▼

‘물고기는 헤엄치고, 새는 날고, 인간은 달린다.’ 2003동아서울국제마라톤대회 참관은 체코의 마라톤 영웅 에밀 자토벡의 명언을 실감하게 해준 생생한 경험이었다. 다시 봄이다. 겨울을 견뎌온 세상의 모든 빈 나무들은 곧 저 혼자의 힘으로 희고 붉은 꽃 무리를 피워 낼 것이다. 3월 16일, 광화문으로부터 잠실까지 우리 모두는 환한 새 봄의 시간을 움틔웠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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