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이 있어서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인지, 민주주의가 있기에 토론이 가능한 것인지는 모른다. 지위의 차이 때문에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의 무게가 다르게 여겨지는 비민주적 조건이라면 약자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면서 강자와 토론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토론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기본적인 도구이자 특권이라는 사실이다.
▼반론을 저항으로 여겨선 안돼 ▼
어느 현인의 말처럼 토론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개선(改善)이다. 그런 면에서 토론은 논쟁이나 언쟁과 구분된다. 지난번 대통령과 평검사들간의 대화는 과연 어느 쪽이었을까. 강자는 토론이 상대를 압도하고 ‘꽉 쥐도록’ 해주는 도구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런 토론에서는 반론이 저항으로 여겨지고 비판은 격파해야 할 트집 정도로 여겨질 뿐이며 결론이 나와봤댔자 분별력 있는 다수의 집약된 의사와는 거리가 멀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토론은 어때야 하는가. 이상적 토론의 성격은 언젠가 필자가 본란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악마의 변론인(devil’s advocate)’이란 존재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악마의 변론인’은 가톨릭교회가 성인(聖人)으로 천거된 사람을 검증할 때 악마처럼 달라붙어 허물을 들춰내는 역할의 사람을 말한다. 요즘은 토론과정에서 타당성을 검증하기 위해 일부러 반대되는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을 일컫기도 한다.
토론의 목적이 현명한 결론을 도출하는 데 있다면 강자는 상대적 약자가 ‘악마의 변론인’처럼 여겨지더라도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조건이 충족되지 못한다면 자유를 잃은 토론은 무의미해지고 결과는 한쪽이 갖고 있던 일방적 주장의 관철로 끝나게 마련이다. 그런 토론은 새로운 갈등을 잉태할 뿐이다.
대통령을 포함한 정부인사들의 생각이 반론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항상 완벽할 수는 없다. 어떤 형태이건 검증의 단계를 거쳐야만 그들의 철학은 비로소 허점이 보완된 국정좌표로 선택될 수 있고 집행에 성공할 수 있다. 여기서 집권자가 가져야 할 자세는 포용이다. 집권자에게 ‘악마의 변론인’은 비판적 언론과 시민단체, 그리고 집권층과 이념의 좌표가 다른 국민이다.
집권초반기에 이들의 반론을 저항으로만 여긴다면 정권의 단추는 처음부터 잘못 끼워지게 된다. 갈등의 결과로서 ‘악마의 변론인’들이 기능을 상실하고 ‘순종’의 길을 걷게 될 때 충분히 검증되지 못한 정책들은 그만큼 실패의 가능성을 더 안고 집행될 것이다. 집권자가 억압하면 이 성가신 ‘악마의 변론인’들은 한순간 침묵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이 사회에서 제거되지도 않고 또 제거되어서도 안 되는 존재들이다. 세계화시대 다른 나라가 지켜보고 있는 마당에 그렇게 하는 것이 국익과 정권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로마시대의 ‘황제역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무언가를 결정할 때 반드시 남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결정이 늦어 답답하다는 비판에 ‘친구들이 나 한 사람의 생각에 그냥 따르는 것보다 내가 많은 친구들의 생각을 듣고 따르는 것이 옳지 않은가’라고 말했다(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마르쿠스는 황제이면서도 이렇게 남의 말을 존중하는 자세 때문에 로마 역사에서 가장 현명한 황제 5명(5賢帝) 중 한 사람으로 꼽혔는지도 모른다.
▼비판언론 반대여론 포용해야 ▼
‘악마의 변론인’들이 내뱉는 주장들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영국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의 말처럼 ‘민주주의는 심지어 무책임하게 보이기도 하고 거짓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말을 포함해 어떤 주장도 수용되는 제도’이다. 앞으로 5년, 노 대통령이 민주정치를 실천하고 싶다면 이 사회에서 ‘악마의 변론인’들이 제 기능을 하도록 지켜줘야 한다. 그리고 ‘민주적’ 토론과정을 거쳐 자신의 주장을 다듬고 거기서 터득한 논리로 국민을 설득할 때 여론은 노 대통령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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