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정진홍/나는 자꾸만 살고 싶다

  • 입력 2003년 3월 27일 18시 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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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책을 한 권 샀다. 화려한 장정의 책은 아니었지만 왠지 마음이 끌렸다. 그 책 제목인즉 ‘나는 자꾸만 살고 싶다’. 그저 ‘살고 싶다’가 아닌 ‘자꾸만 살고 싶다’는 그 말이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 책의 필자이자 주인공은 40대 초반의 안효숙씨다. 그녀는 외환위기로 부도를 맞아 가게문을 닫고 졸지에 길바닥에 나앉았다. 5년 전 외환위기 시절에 우리 주변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아니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그런 경우 중 하나였다. 사업에서 망한 후 삶의 의욕마저 잃어버린 남편에게서 느는 것은 술주정과 주먹다짐뿐이었다. 결국 살던 집마저 경매로 넘어가 온 식구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형편으로 내몰렸다. 세상은 그녀를 향해 ‘죽어라, 죽어라’ 했지만 그녀는 그래도 ‘자꾸만 자꾸만 살고 싶었다’.

당시 그녀의 유일한 바람 한 가지는 헤어진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방 한 칸 빌릴 돈을 손에 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찬물, 더운물 가리지 않고 일했다. 식당 허드렛일부터 길거리 빵장사, 면도기 장사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녀는 그 ‘원수 같은’ 돈을 벌기 위해 시골 5일장을 떠돌며 ‘동동 구리무’를 파는 장돌뱅이 신세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해 그녀는 마침내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옥탑방 한 칸을 구할 수 있었다. 곧추서면 머리가 천장에 닿아 몸을 숙이고 살 수밖에 없는 그런 방이었지만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녀는 행복했다.

그녀는 지금도 영동장 옥천장 청산장 신탄장 금산장 상주장 등을 떠돌며 시골 장바닥에서 ‘동동 구리무’를 팔고 있다. 그 모진 세월 속에서도 그녀는 ‘자꾸만 살고 싶다’는 질긴 삶의 몸부림을 희망처럼 껴안고 살고 있다.

사람들은 요즘이 외환위기 때보다 살기가 더 힘들다고 말한다. 엄살이 아니다. 엄살 피울 정도의 여유조차 없는 것이 요즘이다. 외환위기는 ‘꽝’하고 터졌다. 그래서 비록 폐허 같은 상황일지라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시 시작해 보자는, ‘이 악무는’ 오기 같은 분위기라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끝을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의 미로 속에 갇혀버린 채 발끝부터 뭔가에 자근자근 씹혀서 먹히는 듯한 분위기다. 더구나 자신은 카드빚, 가계빚에 쫓겨 지내는데 세상은 야속하리만큼 그럭저럭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니 사람들 속은 더 타들어간다. 그러다 결국 ‘배 째라’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신용불량자’ 낙인을 찍게 된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이라크전쟁에서만 사람이 죽는 것이 아니다. 달리는 차 안에서 라디오 뉴스를 들어보니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어느 중년 가장이 증권으로 돈을 날린 뒤 이를 비관해 투신자살했다고 한다. 이라크전쟁의 여파로 온 나라가 뒤숭숭한 판국에 뉴스에서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은 사람의 죽음이 대수롭게 여겨질 리 만무하다. 하지만 채 15초도 되지 않는 그 짧은 뉴스로 처리되어 버린 어느 중년 가장의 죽음은 이라크전쟁보다 더 가까이 있는 우리의 진짜 현실이다.

자살한 그 중년 남자는 두 딸 앞으로 유서를 남겼다고 한다. 사실, 차마 입에 담을 이야기는 못되지만, 유서 한 장 남기고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싶은 심정을 가슴 깊은 곳에 감추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언론은 연일 이라크전쟁으로 도배를 하고 국회에서는 파병을 하느니, 안 하느니 하며 여론 눈치보기에 여념이 없다. 경제와 교육 양 부총리는 세계무역기구(WTO) 교육개방 양허안을 갑론을박하고, 문화관광부 장관의 이른바 ‘홍보방안’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거기에 대통령은 한총련을 합법화하느니, 안 하느니 하는 논란의 불씨를 새로 지피고 있다.

정작 외환위기 때보다 더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고 위안이 될 만한 이야기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참여의 정치’가 구호처럼 난무하는 세월 속에서 말없는 사람들은 묵묵히 ‘생활의 정치’를 고대하고 있는데 말이다.

atombit@atombi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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