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파람새와 비둘기가 운다. 간밤엔 소쩍새가 울었다. 새들의 소리와 풀벌레 소리는 푸른 색깔이고 가슴 뭉클하게 하는 향기가 묻어 있다. 향기와 푸른 소리는 우울증과 신경증을 치유한다.
비 오거나 풀잎에 이슬이 맺혀 있으면 바닷가 모래밭으로 산책을 한다. 자연 바닷가 산책과 아침 산 오르기를 번갈아 하게 된다. 내 앞에 가로누워 있는 쪽빛 바다, 먼 데서 달려와 모래톱에서 재주를 넘으며 소리치는 파도는 특이한 율동을 풋늙은이의 몸속에 유입한다. 바닷가 산책이 침체한 몸과 마음을 활성화시키곤 한다면 산길 오르기는 마음을 가라앉게 한다. 바야흐로 쓰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과 함께 다닌다.
산책을 다녀오자마자 따스한 물을 뒤집어쓰고 나서 아침밥을 먹고 차를 마신다. 나의 사는 재미는 매끼 포도주 한 잔씩 하고, 차 마시고, 소설 쓰고, 연못에 투영된 또 하나의 우주 보기, 거기에 피어난 수련꽃과 비단잉어하고 놀기가 고작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소설을 쓰다가 가슴이 답답해지면 연못 주위를 바장인다. 수련꽃에는 황금색 꽃술 60여개가 있다. 꿀벌이 그 속에 들어가 꿀을 빤다. 그 깊은 은밀한 속을 무람없이 드나드는 그놈에게 질투를 느낀다.
응접실로 들어와 비발디의 ‘사계’를 틀어놓고 창밖을 내다보는데 붉은색 털, 황갈색 털과 청동빛 깃으로 성장한 장끼가 철쭉나무들 사이를 어정거린다. 자기를 주시하고 있는 한 풋늙은이가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하고 텅 빈 마당으로 올라온다. 마당을 건너 이웃 깨밭을 지나 대밭 쪽으로 간다. 까투리 하나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 어정거리는 그놈을 살피기 위해 현관문을 열고 나간다. 그놈도 혹 풋늙은이 아닐까. 현관 문 여는 소리에 그놈은 뒷산 아카시아나무 숲 속으로 날아가 버린다.
이웃 폐가 사립으로 간다. 밀원 찾아서 꿀벌 통 싣고 온 남자가 마루 위에 팔자 좋게 누워 있다. 그의 벌통에는 벌들이 바쁘게 드나들기도 하고 주위를 휘돌면서 경계를 한다. 찬란한 햇살을 머리에 인 채 벌 주인에게 실없는 농담을 하고 싶어진다. 다혈질인 그 남자는 찔레꽃 아카시아꽃이 벌어지기 시작하던 날 아침 트럭에 벌통을 싣고 와서 폐가 마당에다 늘어놓고 인사를 왔었다.
풋늙은이는 벌통 주위를 어지럽게 비상하는 벌들에게 지은 죄 없지만 쏘일까봐 무섭고 괜히 심술이 난다.
“우리 연못에 수련꽃이 한 70여송이나 피어 있는디, 가끔 당신네 벌이 와서 꿀을 빨아가고 화분을 묻혀가곤 하구만이라우. 갈 때 우리 수련꽃에서 빨아간 꿀값하고 뒷다리에 묻혀간 꽃가루값하고 주고 가시요.”
그 농담을 그냥 입속에 담고 자궁 같은 연못으로 간다. 연못에 들어와 있는 하늘 구름 산 감나무 수련꽃 그림자들을 완상한다.
풋늙은이는 자신의 소설 ‘초의’가 그 스님을 짝사랑한 여자를 설정함으로 해서 쉽게 풀렸다고 생각한다. 연못은 나에게 무엇일까. 나는 전생의 복과 현생의 복과 내세의 복까지를 지금 다 누리고 있는 듯싶다. 내세에는 누릴 복이 바닥나서 심심할 것이다.
아침 산책길에서 눈부시게 희고 향기로운 꽃들을 보며 문득 알 수 없는 슬픔이 느껴졌다. 영랑이 느낀 ‘찬란한 슬픔’은 사람을 진정성 속으로 몰아넣는 향 맑은 촉기이다. 그 촉기가 좋은 글을 쓰게 할 터이다. 서재로 글을 쓰기 위해 들어간다. 나의 글쓰기라는 것은, 전원에서의 자유자재를 글의 너울 속에 꽃향기 풀향기를 버무려 풀어놓는 일에 다름 아닐 터이다.
▼약력 ▼
중진작가로 ‘아버지와 아들’ ‘물보라’ 등 많은 소설을 썼다. 서울에 사는 동안 심한 위장병으로 고생하다가 1997년 고향인 전남 장흥으로 낙향해 바다와 산과 더불어 생활하고 있다.
한승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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