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일과 꿈]황주리/제 그림이 어렵나요?

  • 입력 2003년 6월 18일 18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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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나는 늘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불렸다. 하지만 어릴 적 나의 진짜 꿈은 엉뚱하게도 갈 곳 없는 가난한 노인들을 위해 살기 좋은 양로원을 짓는 거였다. 길을 걷다 수족이 불편한 노인들을 보면 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원대한 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는 남이 무어라든 나만 좋으면 그뿐인, 몹시 개인적인 한 사람의 예술가가 되었다.

▼대중과 가깝다고 자부했는데…▼

요즘 나는 서울 인사동 길 한가운데 있는 모 화랑에서 개인전을 여는 중이다. 인사동의 일요일은 유난히 붐빈다. 렌즈에 그림을 그려 넣은 수백 개의 안경들이 걸려 있는 조금쯤 색다른 나의 전시장 안으로 걸어 들어온 사람들의 표정은 벽에 걸린 안경들만큼이나 다양하다. 짐짓 모르는 척 사람들 속에 섞여 군중의 소리를 들어보려 애쓴다.

누군가 함께 온 여자친구의 어깨에 손을 두르며 묻는다. “이거 혼자 다 그린 거 아니지?” 그 곁의 숙녀분이 답한다. “글쎄, 아마 아닐걸. 여러 사람이 그린 거겠지. 안경이 무지 많은데?” 이런 소리를 들을 때는 갑자기 온몸의 힘이 쭉 빠진다. 그들은 화랑 현관에 걸려 있는 누구누구의 전시라는 간판조차 보지 않고 들어온 것이다. 그들은 이게 누구의 전시인지, 무엇을 그린 것인지, 영원히 모르는 채 화랑을 떠날 것이다. 어쩌면 인사동에 걸려 있던 수많은 안경들, 그 정도는 기억할까? 그래도 대중과 꽤 가까운 편이라 자부하는 내가 이럴 정도면 다른 화가들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물론 수없이 밀려들어오는 사람들 중에는 일부러 전시를 보러 찾아온 사람도 많다. 20년 뒤쯤엔 나의 열성 팬이 되어줄지도 모를, 부모를 따라 들어오는 꼬마 관람객들을 절대 무시해선 안 된다. 중고등학교 시절 인사동 언저리에 살았던 나는 이 골목을 수없이 지나며 김환기와 박수근과 천경자의 그림을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길가는 사람을 붙들고 “화가 김환기를 아시나요?” 하고 물으면 사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연예인과 스포츠 스타가 가장 각광받는 이 시대에 시인이나 화가로 살아가는 일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렇게 고전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순간, 어떤 묘령의 여인이 다가와 묻는다. “이 안경 그림을 팔기도 하나요? 맘에 드는 안경테가 하나도 없는데, 안경을 들고 오면 그려주실 수는 없나요?” 또 다른 관람객이 묻는다. “그림이 그려진 이 안경을 쓰고 다닐 수 있게 보이게 해줄 순 없나요?” 그 순간 나는 엉뚱하게도 향년 87세로 최근 별세한 할리우드의 전설 그레고리 펙이 떠오른다.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 죽음이 갖는 울림의 폭이 너무도 큰 그레고리 펙의 그림자. 추억의 영화 속의 잊혀지지 않는 명배우 명장면이 아닐지라도, 라디오에서 오랜만에 듣는 흘러간 옛 노래만 해도 얼마나 오래 남는 것일까.

문득 끼리끼리나 알아주며 머리를 끄덕이는 어려운 현대미술을 하는 사람의 자부심과 자존심과 열등감이 뭉뚱그려져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순간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하나가 다가와 내게 묻는다.

▼아는 사람 적지만 작은 행복 감사 ▼

“혹시 경복초등학교 5학년 1반 강갑중 선생님반 아니셨어요?” 존댓말로 시작되어 곧 반말 대화로 이어진 초등학교 동창생과의 해후는 정말 반갑다. “너 어릴 때 그린 그림하고 똑같다.” 화랑이라는 데를 처음 와본다는, 일부러 맘먹고 찾아와 준 고마운 초등학교 동창생이 던진 한 마디 말은 어떤 비평가의 어려운 문장보다 내 가슴에 싸하고 와 닿는다. 문득 전람회를 여는 화가의 소박한 행복을 맛본다. 에이 사는 게 뭐 별건가. 이 풍진 세상에서 아직도 그림을 그리며 살 수 있다는 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든다.

▼약력 ▼

△1957년 생 △이화여대 미대 서양화과(1980),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1983), 뉴욕대 대학원 졸업(1992) △24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200여회의 기획 단체전 참가 △석남미술상(1986), 선미술상(2000) 수상

황주리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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