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파업 ‘위장된 명분’▼
세미나가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발표장을 빠져나왔다. 아직 오후 4시가 되지 않았지만 철도파업의 여파가 틀림없이 서울의 교통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평소 3∼4분 만에 오던 지하철은 10분 가까이 기다려야 왔고, 아직 퇴근시간이 멀었는데도 전동차 안은 승객들로 북적댔다. 국철로 갈아타는 구간에서는 평소 10여분 간격으로 운행되던 열차가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의약분업 때 한번 크게 혼이 난 뒤 파업현장은 재주껏 피해 가는 것이 살아가는 지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레이저 수술 후 십여 군데의 약국을 돌아다녔으나 처방전 치료약 판매를 거부당한 후 분노에 찬 목소리로 약사에게 항의했을 때 돌아온 답은 의사들에게 항의하라는 말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수술이 아니었던 것을 다행으로 알았다. 그러나 뙤약볕 때문에 생긴 그때의 부작용을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한 희생으로 생각하기에는 무엇인가 억울했다.
그 후로 늘 신문 방송의 파업 소식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기민하게 대처했다. 조흥은행 파업 때는 엄마에게 전화해서 그 은행 예금을 모두 찾으라고 충고했고, 파업이 유난히 잦은 병원에는 아예 출입을 말렸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문제로 교육부, 전교조, 교총이 대치했을 때는 고 3학생을 둔 친척에게 전화해 아이의 거취에 대해 의논하기도 했다.
미리미리 알아서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파업의 이유가 대의명분으로 위장되어 있기 때문에 더 그랬다. 철도나 지하철의 경우만 해도, 대전역이나 서울역에서의 서명운동에서 ‘철도 민영화 반대’는 국민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했다. 공공성을 지니는 철도를 민영화하면 기업이 이익을 위해 무리하게 운행을 하게 되고, 그것이 대형 참사를 낳는다는 것이었다. 민영화로 영국에 대형 철도사고가 일어났다는 예에 겁이 덜컥 났다. 지금도 달리던 열차가 뒤집히고 공사 중에 지반이 내려앉으며 반대편 열차에 불났다는 연락도 못 받고 불나방처럼 화염 속으로 뛰어드는 판인데, 민영화까지 되면 국민 절반이 노상에서 목숨을 잃을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지하철 운행시간을 한 시간 늘렸을 때도 지하철노조는 안전이 최우선인데 서울시가 무리한 운행으로 대형 사고 요인을 만들고 있다고 비난했다.
당장 열차와 지하철을 타는 내 목숨을 담보로 하는 ‘협박’에 나 자신도 만만한 철도청이나 서울시 당국자들을 비판하게 되었다. 그러나 과연 국민의 안전 때문이었을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근무시간과 복지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증거가 최근 철도노조가 내놓은 조건에서 드러난다. 공사로 전환하는 마당에 공무원 연금법을 적용해달라니 말이다. 결국 철도노조가 민영화를 반대했던 것은 공무원의 안정된 신분과 근무 조건 때문이었단 말인가.
요즈음 TV에 무척이나 낯익은 장면이 자주 비친다. 삭발과 붉은 머리띠, 붉은 등산용 조끼의 사람들이 주먹 쥔 오른손을 들었다 내렸다 하며 장엄하고 엄숙한 노래를 부른다. 어린 소녀의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해달라며 분신자살한 전태일, 몸수색에 항의하며 울부짖던 버스 차장들…. 1970년대 이후 인간의 생존권과 존엄함을 지키려 했던 노동운동의 문화 코드들이 이제는 휘황한 영기(靈氣)를 상실한 채 저만치 던져져 있다. 한때 신성시되던 고대의 종교적 유물들이 조악한 모조품으로 만들어져 시장 좌판에 누워 있는 그런 느낌을 나만 받는 것일까.
▼‘정당한 대가’위해 玉石 가려야 ▼
그동안 권력을 등에 업고 획득되어온 수많은 이권들, ‘백’ 없는 사람들이 살아왔던 서럽고 배고팠던 세월들은 이제 그들에게 새로운 대응 방식을 가르쳐 주었다. ‘백’ 대신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별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자신들의 힘이 ‘백’의 위력과 같아질 때까지 큰 목소리로 외치고 또 외친다. 권력의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는 목소리, 이건 아니다, 이건 가짜다. 열심히 일한 만큼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에 살고 싶다는 우리들의 순수한 염원이 제대로 꽃 피기 위해서도 옥석은 가려져야 한다.
최혜실 KAIST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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