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살아보니]브랜든 카/법보다 情을 내세운다면

  • 입력 2003년 7월 18일 18시 39분


한국에서 미국 변호사로 일한 지 8년째다. 처음 일을 하면서 놀란 것 가운데 하나는 한국 기업들이 사용하는 계약서의 길이였다. 미국 기업들이 건물 임대차 계약 하나에도 수십 쪽에 이르는 장문의 계약서를 사용하는 반면 한국 기업들은 수십억원이 오가는 거래도 단 몇 장의 계약서로 끝내고 있었다.

훗날 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중대한 계약을 계약서 몇 장만으로 종결하는 것이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다툼이 벌어지더라도 법보다는 당사자간 인간관계 속에서의 우호적인 해결을 원하는 경향이 있고 상대에 대한 막연한 신뢰가 있기 때문이라는 내 나름의 결론을 얻게 되었다. 상호신뢰가 강하다는 것은 당사자간에 이미 굳건히 형성된 관계가 있다는 것이고, 법이 아닌 그들만의 규범이 존재함을 방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관계를 가장 중시하는 사회는 그들만의 온정주의로, 그리고 관계를 맺지 않은 타인에 대한 차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지역, 학교, 종교, 정당을 공유한 사람들만의 인간관계가 굳건할수록 외부인에게 그 장벽은 더 높아 보인다. 내부에 들어온 자들은 성 밖에 있는 타자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태도를 보인다. 외부인에게 이런 사회는 닫힌 사회로 보인다.

사회의 리더들, 특히 권력자가 자신의 인간관계에 기반한 온정주의에 기운다면 이는 중대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법을 수단으로 해서 자신의 입지와 권력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법은 가치중립적이기 때문에 외부인들은 법의 적용과 집행 역시 공정하게 이뤄질 것으로 믿기 쉽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가치중립적인 법이라 하더라도 이를 집행하는 실제 의도는 그렇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다.

소위 선진국일수록 인간이 아닌 제도, 시스템에 의해 운영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법의 적용과 집행이 온정주의에 기울지 않고 비교적 가치중립적으로 이뤄짐을 뜻한다. 닫힌 사회 속의 그 누군가와 관계를 맺지 않고도 법의 보호를 받고 내부인과 이방인 모두 법 앞에서 평등하며 그 집행도 공정하게 이뤄짐을 믿을 수 있다면, 그 사회는 인간이 아닌 제도가 자리 잡은 사회다.

노동조합이 불법적인 요구를 내걸며 파업을 하고, 정부가 앞장서서 이를 관철해 준다면 제대로 된 법치가 이뤄졌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여당 국회의원이 정당한 법 집행 절차에 따르지 않겠다고 하고, 이것이 관철된다면 이 역시 제도보다 사람이 앞선 사회임을 보여주는 방증이다. 올바른 법치는 만인에게 공정하게 법이 집행될 때 이뤄지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많은 발전을 이뤘다. 하지만 그 발전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계속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과거와 다른 점은 더 많은 이방인들, 즉 한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 외국 투자자, 외국 정부가 이 사회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외부인들이 한국 사회의 시스템과 그 운용에 안심하는 때가 한국이 진정한 법치국가로 인정받는 시기가 될 것이다.

▼약력 ▼

1969년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출생. 메릴랜드주립대에서 행정학을 전공한 뒤 워싱턴주립대 로스쿨 졸업. 현재 서울 오로라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

브랜든 카 변호사·오로라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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