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박민규/이승엽, 그는 희망을 쐈다

  • 입력 2003년 10월 3일 00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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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우리는, 대구구장의 펜스를 넘어가는 아름다운 포물선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작고 때 묻은 한 개의 야구공이었지만 우리 모두의 가슴을 관통한 신비의 유성(流星)이기도 했고 아시아의 야구사를 고쳐 쓴 하나의 방점이기도 했다. 국민타자 이승엽의 시즌 56호 홈런. 아시아 시즌 최다 홈런의 신기록이 달성되는 순간이었다.

일본프로야구의 60년 역사를 생각해도, 홈런왕 행크 애런의 한 시즌 최다홈런기록이 47개임을 생각해도 이승엽의 이번 기록은 실로 자랑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 정치와 경제, 재해와 수해에 시달린 나, 너, 우리, 대한민국에는 이승엽이 있었다. 눈물겨워라,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왜 그랬을까. 아치를 그리며 뻗어 가는 타구를 보며, 또 유유히 다이아몬드를 돌아오는 이승엽을 보며―그러나 나는, 이 ‘아시아 최다’에 빛나는 장쾌한 홈런이 ‘러닝 홈런’이란 생각을 했다. 정말이지, 왜 그랬을까?

한 소년이 있었다. 야구를 좋아하긴 했지만 운동신경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조차 만류를 거듭했을 정도로 공을 던지는 모습은 늘 어설펐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고래심줄’ 같은 고집이 있었다. 결국 소년은 야구를 시작했다. 바라던 투수가 되었지만 인생은 순조롭지 않았다. 운도 없었다. 프로에 입단한 후 팔꿈치에 큰 부상을 했다. 수술을 받았지만 투수로서의 생명은 이미 끝이 난 상태였다. 그는 좌절했고 결국 타자가 되었다. 제2의 인생. 뒤늦은 출발이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뇌종양으로 쓰러진 어머니가 있었다. 방출 선수나 2군 선수가 아닌 바로 이승엽의 이야기다. 알고 보면 세상의 모든 홈런은 ‘러닝 홈런’이다. 적어도 야구에선 분명 그러하다. 보아라, 유유히 홈으로 귀환하는 이승엽의―그 배후의 땀과 안간힘과 눈물과 노력을. SK의 팬인 내가, 기아의 팬인 당신이, 또 한화와 롯데의 팬일지도 모를 ‘우리’와 대한민국이 이승엽의 홈런에 모두 감동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아름다워라. 땀과 노력과 달리기의 저 고귀한 아름다움.

무수한 ‘러키 홈런’에 우리는 시달려 왔다. 로또와 부동산 투기, 비자금과 낙하산, 학벌과 파벌, 재벌들의 ‘한 방’에 우리는 내내 시달려 왔다. 간다. 우리는 손도 못 대 본 세상, 자알 간다. 넘어간다. 훠이, 잘도 넘어가는 저들의 러키 홈런―달리는 우리를 지치게 한 것은, 저 악성의 러키 홈런과 그 배후였다. 지친 친구여. 이제 우리는 이승엽을 생각하자. 그리고 펜스를 넘어가던 은빛의 홈런볼을 기억하자. 홈런을 친 것은 러키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국민타자 이승엽과 지금 달리고 있는 나, 너, 우리, 대한민국이다. 살아서 가자, 살아서 오자. 홈런의 정의를 보니―‘타자가 본루까지 살아 돌아올 수 있도록 친 안타’이다. 살아서 가지 않으면, 살아서 오지 않으면 홈런이 아니다. 달리자 친구여, 유유히, 끝까지 살아서, 우리 함께 돌아오자. 대구의 환호와 박수소리는 나, 너, 우리, 대한민국의 모든 러닝 홈런을 위한 메아리였다.

이승엽이 세운 놀라운 업적은 ‘아시아 최다’의 휘황찬란한 라벨이 아니었다. 실은 달려온 인간이, 땀 흘린 인간이―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유유히, 자신의 홈을 밟는 모습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준 데에 있다. 러닝 홈런이 아닌 홈런은 모두 파울이다. 땀 흘리며 달리는 인간들이 비로소 환호할 수 있을 때, 아마도 대한 사람은 대한으로 길이 보전될 것이다.

실은 저 ‘러키 홈런’ 앞에서 고개 숙인 우리 모두의 삶이 홈런이다. 지하철 참사와 태풍, 수재와 인재, 불황과 실업, 여야의 정치에 시달려 온 우리 모두에게-국민타자 이승엽은 그 희망의 증거를 보여주었다. 달리자 친구여. 달려라 친구여. 아마도 그 때문에, 어제 ‘유유히’ 본루로 돌아오는 그의 모습에 나는 한 움큼의 눈물을 훔친 건지도 모르겠다.

배종대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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