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포럼]최경주/‘무등산 공유화 운동’ 그후

  • 입력 2003년 10월 6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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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1186m)은 ‘빛 고을 광주’를 포근히 감싸 안은 명산이다. 선사 이래 신성한 산으로 여겨졌고 통일신라와 고려시대까지 무진악, 서석산 등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독특한 산세와 수려한 경관을 예찬하는 전국의 문인과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예술활동의 무대로, 광주가 ‘예향(藝鄕)’이라는 명칭을 얻는 데에 일조했다.

그러나 원시림 같은 무등산은 일제강점기 간벌과 6·25전쟁으로 황폐화됐다. 여기에다 무분별한 개발까지 가세하면서 점차 본모습을 잃어 갔다. 그런 무등산이 다시 살아난 것은 광주시민이 수년에 걸쳐 보호운동을 벌인 덕분이다.

무등산은 1965년 정상과 그 부근에 군부대가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둘씩 훼손돼 갔다. 1966년에는 방송중계소가 들어섰고 1984년부터는 군부대와 행정기관, KT 등의 통신망이 곳곳에 설치됐다. 수려하던 무등산의 스카이라인은 흉한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

‘무등산 살리기’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80년대 후반이다. 맨 처음 나선 이는 광주지역 산악인들과 산을 아끼는 시민이었다. 이들은 산 이곳저곳에 쌓여 가는 쓰레기를 되가져오자는 운동을 펼쳤다. 1989년에는 무등산 보호를 위한 시민단체가 결성돼 현안에 대해 각종 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다양한 보호운동을 벌였다. 특히 ‘무등산에서 취사 안 하기 운동’, ‘흙 한줌으로 무등산 되메우기 운동’ 등은 호평을 얻어 전국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행정적 또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추진되던 무등산 개발계획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무등산 관통 일주도로를 건설하려는 광주시의 계획을 시민운동으로 백지화시킨 것이다. ‘무등산을 시민의 품으로’란 캐치프레이즈 아래 벌어진 군부대 이전 운동은 결국 1990년 출입통제구역이 해제되면서 결실을 보았다.

시민들은 그제야 무등산의 3대 석경(石景)을 이루는 서석대와 입석대의 빼어난 경관을 감상할 수 있게 됐다. 1990년 무등산 제1수원지 부근에서 온천이 발견되면서 시작된 온천 개발 논쟁은 시민들의 무등산 보전 여론에 밀려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제 무등산 보호운동은 환경보호에 있어서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해 주목받고 있다. 그것이 바로 ‘무등산 공유화 운동’이다. 이 운동은 시민이 자발적인 모금이나 기부를 통해 훼손되거나 사라지기 쉬운 자연 및 문화유산, 지역 땅이나 시설물을 사들여 영구보존하는 것으로 1994년 처음 시작됐다. 외국에서는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으로 잘 알려진 이 운동은 그 뒤 전국으로 확산돼 자연환경과 문화유산을 지키는 유력한 수단이 되고 있다.

이처럼 무등산 보호운동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졌고 많은 성과를 올렸다는 점에서 시민운동의 새로운 전형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국의 자연유산이 개발이냐 보전이냐의 딜레마에 빠져 서로 대립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양적 성장을 위한 개발논리가 우리 사회에 발전을 가져오는 전부는 아니라는 점이다. 환경의 보전과 개발이라는 두 가치 사이에서 무엇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 심사숙고가 필요한 시점이다.

최경주 조선대 정책대학원 겸임교수 대한산악연맹 기획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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