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장소원/'한글'처럼 당당하게

  • 입력 2003년 10월 7일 18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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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한글날이다. 10월 9일이 한글날이 된 것은 1946년부터로, 훈민정음 해례본에 기록된 훈민정음의 반포일인 1446년 음력 9월 상순을 양력으로 추산한 것이다. 북한에서는 훈민정음의 창제일인 1443년 1월 15일에 의의를 두어 해마다 1월 15일을 기념한다.

한글날을 언제로 잡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우리가 이 날을 기념할 수 있는 까닭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문자들과 달리 한글은 만든 사람과 만든 시기를 아는 유일한 문자체계이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글이 과학적이며 독창적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란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떤 점에서 한글이 이처럼 우수한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한글이 그와 같은 평가를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상형(象形)과 가획(加(화,획))으로 규정되는 창제 원리에 있다.

▼세계가 인정한 자랑스러운 遺産▼

한글의 자음은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 다섯 개의 기본자음에 소리가 거세짐에 따라 하나씩 획을 더하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모음 역시 천(天), 지(地), 인(人)의 삼재(三才)를 상형하여 ‘ㆍ’ ‘ㅡ’ ‘ㅣ’의 세 문자를 만들고 나머지는 이들을 조합하였다. 오늘날까지도 모 휴대전화 회사에서 문자메시지를 위해 이 방식을 이용하는 것을 보면 그 뛰어남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지구상에는 4000여개의 언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문자로 적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불과 40여개의 문자체계가 존재할 뿐이다. 이들 가운데 한글은 가장 발달된 음소문자에 해당한다. 한글의 우수성은 1997년 유네스코가 훈민정음을 세계기록유산의 하나로 지정한 데서도 알 수 있다. ‘인류가 발명하거나 발전시킨 세계적 기록문화 유산’으로 한글이 당당히 인정받은 셈이다.

‘유산’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최근 필자는 아주 생소한 상황에서 이 표현을 들었다. 원정 출산과 관련된 보도에서였다. 최소 2000만원을 들여 만삭의 몸으로 항공기 여행을 하는 위험을 감수한 산모들로부터 “자식들에게 몇 억원의 돈을 유산으로 남겨주는 것보다 미국 국적을 유산으로 남겨주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내가 아는 ‘원정’의 뜻은 분명 먼 곳으로 싸우러 나가는 일이다. 싸우러 가는 것과 아이를 낳는 것은 아무 관련이 없다. 바람직한 출산은 평화로운 가운데 가족과 친지의 축복을 받으며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지난 1년 동안만 해도 5000여명의 임신부들이 목숨을 걸고 장거리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을 보면 이들이야말로 전투에 참가하는 군인들보다 더 용감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이유에서 ‘원정 출산’이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에게 보다 넓은 세계와 기회를.’ 원정 출산 알선업체의 광고문구다. 이들에 따르면 원정 출산은 국내의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벗어나 저렴하고 질 높은 교육의 기회를 보장한다. 또 엄마의 뱃속에서부터 세계화의 추세에 발맞출 수 있고, 남자의 경우 병역 의무까지 회피할 수 있으니 원정 출산은 그야말로 가문에 길이 빛날 유산처럼 보인다.

▼원정출산 아이 떳떳할 수 있을까▼

흔히 유산이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돈이나 부동산 같은 재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람직한 유산이란 살아가는 데 정신적 지주가 되며, 떳떳하고 자랑스러워서 후대에 길이 전해 주고 싶은 것이어야 한다. 이중국적을 유산으로 받은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을 때 과연 자신들이 받은 유산에 대해 자랑스럽고 떳떳해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한글은 분명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기에도 선조들은 한글의 강습과 보급에 힘을 쏟았다. 1933년 한글맞춤법 통일안이 공포되었을 때 동아일보사는 신문사 가운데 가장 먼저 이를 받아들였고 한글 강습에도 참여했다.

해마다 한글날이 되면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거리에 넘쳐나는 외국어 간판을 비춰 가며 이제는 무감각해진 외국어 사용을 걱정한다. 내일 한글날에는 자랑스러운 유산으로서의 한글을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장소원 서울대 교수·국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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