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민주투사로 영웅화됐던 송 교수의 정체가 수사기관의 추궁과 본인의 변명을 거쳐 한 꺼풀씩 벗겨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가 느끼는 것은 한 인간으로서 심한 모멸감이요, 송 교수와 같은 지식인으로서 배신감과 수치심이다.
▼‘송두율 사건’ 냉철하게 바라봐야▼
유신체제의 칼날이 번득이던 70년대 초 혈기 있는 젊은이가 친북(親北)의 길을 택한 것은 이해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철학자로서 이름을 갖고 있으며, 거액의 북한 돈을 받아썼고, 김일성의 장례식에 서열 23위의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초청받은 사람이 어떻게 공산당 입당원서를 단지 입북 절차의 일부인 줄 알고 써내고는 잊어버렸다는 유치한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
송두율과 김철수라는 두 개의 마스크를 갈아 쓰며 살아왔던 가련한 지하공작원의 모습은 그럴 수밖에 없다 하자. 진정으로 걱정스러운 것은 그를 통일운동의 이론적 대부로 영웅시하다가 그의 공산당원 정체가 드러나는 과정을 지켜보고서도 아직까지 그의 행태를 변호하고 있는 일부 지식인들이 드러내는 지적(知的) 도덕적 혼미다.
송 교수의 ‘내재적 접근법’을 적용한다면 김일성 독재는 정당화되고 박정희 전두환 독재는 안 되는가. 어제까지도 자기 정체를 부정하며 독일인들의 힘까지 빌려 수사망을 피하려 하던 주체사상 숭배자가 그 탈이 벗겨진 오늘에는 남한에 남아 활동할 의사가 있다고 선언했다 해서 반기고 감동해야 할 일인가. 송두율-김철수가 이른바 ‘경계인’으로서 남북한간 평화적 화합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아직도 믿는가.
관용과 순진함도 지나치면 무책임이 된다. 참된 지식인이라면, 특히 한국의 참여지식인이라면 누구나 한계상황 속에서 자기의 역할을 찾아야 하는 부담을 안고 산다.
분단과 이념적 대치상황에서 태동한 남북한의 정치체제는 어느 쪽에서고 태생적으로 기형적이고 탄압적인 것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타락한 공산주의 체제와 독재로 굴절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도록 대내외적 압력을 받고 있는 한계상황 속에서 양심 있는 지식인들은 온 겨레가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며 살 수 있는 공간을 넓혀가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쳐야 했다. 퇴치해야 할 적(敵)은 정치적 탄압만이 아니라 절대가난 질병 무지 침략위험 등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어느 것 하나 피나는 투쟁 없이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바로 그런 투쟁의 결과로 인권이 실질적으로 신장되고 민주화의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자기 쪽의 독재체제가 밉다고 자기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다른 쪽의 독재체제에 힘을 실어주는 얼빠진 선택이 민주화나 통일을 촉진시킬 수는 없다.
장기표씨가 지적했듯이 송두율 사건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들은 순수한 동기로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수많은 민주투사들이 억울하게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혀 수난을 당했어도 제대로 말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송두율-김철수 같은 존재들 때문이 아니었던가. 이번 사건의 처리과정에서 국가보안법의 존치를 주장한 수사기관이 국민 앞에 가장 높은 점수를 땄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이 사건이 낳은 가장 큰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다.
▼지나친 관용-순진함은 무책임▼
10월 9일은 북한이 저지른 아웅산 폭탄테러 사건으로 우리 정부의 최고위급 인사 18명이 순국한 지 20주년 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여중생 2명을 대규모 촛불시위로 기리는 우리 국민은 송 교수도 높이 평가한다는 경제 기적을 낳은 주역들, 국민 모두의 은인들의 20주기는 거의 잊은 채 지나쳤다.
이러고도 우리가 애국적 헌신을 기대할 수 있는가. 형제에 의한 살인은 살인도 아니니 덮어두어야 한다고 믿는 것인가. 이런 도덕적 지적 혼미와 불균형을 극복하지 않고도 우리가 나라를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인지 앞날이 심히 걱정된다.
이인호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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