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다수’도 자신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여서 요구조건을 주장하며 큰 목소리로 외칠 수 있다. 그러나 맡은 일의 중요성을 알고 있고 이 사회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불편을 참고 언젠가는 자신들에게도 귀 기울여 주기를 바라며 묵묵히 자기 일을 수행해나가는 것이다. 이 ‘조용한 다수’는 소모적인 논쟁보다 생산적인 일을 하며, 생색나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한다. 일의 결실을 독차지하지 않고 전체와 함께 나누며,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필요할 때는 자신을 희생하기도 한다.
우리 몸에도 ‘조용한 다수’에 해당되는 장기가 있다. 일명 침묵의 장기라고 하는 간(肝)이 그것이다. 간은 우리 몸에서 가장 크고, 우리가 건강을 유지하고 활동하도록 해주는 중요한 장기다.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나누어 주고, 우리 몸에 필요한 것들을 생산하며, 외부에서 오는 독을 해독하고 세균 등을 막아내어 보호한다. 이처럼 간이 매우 다양한 어려운 일들을 하고 있는지라 현대의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인공 간장을 만드는 데는 미치지 못한다. 반면 다행스럽게도 간은 세포가 손상되면 자체적으로 재생돼 필요한 만큼을 채워 기능을 유지한다.
신체의 다른 부위는 병이 생기면 일찍 아픈 증상이 나타나 관심을 끈다. 그러나 간은 초기에는 증상이 전혀 없거나 있어도 뚜렷하지 않아 주의하지 않으면 병이 있는지 잘 알아채기 어렵다. 반면 증상이 나타나는 시기에는 치료시기를 놓친 경우일 때가 적지 않다. 따라서 간에 이상이 오는지를 알려면 ‘침묵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격렬히 자기주장을 하는 곳에만 관심을 갖고 ‘조용한 다수’에 대해 무관심하면 언젠가 이들도 희망을 잃고 하던 일을 멈추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건강을 유지하려면 간의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간이 침묵한다고 해서 염증이 생겨도 관심을 갖지 않고, 간에 해가 되는 술과 약물을 남용하거나 문란한 생활 습관 등으로 간을 혹사하면 장기간 상처를 받은 간은 하던 일을 멈춰버릴 수 있다. 간에 오랫동안 상처를 주면 간이 점차 굳어져 회복이 어려운 상태가 되는데 이를 간경변증이라고 한다. 이 경우에 합병증이 잘 생기며 황달, 복수(배에 물이 고이는 증상), 혼수 등이 나타나고 간암도 생길 위험도 높아진다.
우리나라 40대 성인 남성의 사망원인 1위가 간질환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간질환이 많은 이유는 만성 바이러스성 간염과 잘못된 음주습관 때문이다. 소중한 간을 사랑하고 보호하자는 뜻에서 10월 20일이 간의 날로 제정돼 있다. 올해로 4회째가 되는 간의 날을 맞아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침묵의 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권한다. 일상적으로 간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간염을 바르게 예방하고 퇴치하며 건전한 음주습관을 유지해 간을 건강하게 지키는 것이 국민 건강을 지키는 길이다.
한광협 연세대 의대 교수·내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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