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고은주/성미산으로 초대합니다

  • 입력 2004년 1월 12일 18시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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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막 걸음을 떼기 시작한 딸과 성미산에 들렀다. 추워졌다는 핑계로 집안에만 있다가 ‘첫 걸음마의 기억이 딱딱한 시멘트와 아스팔트에 대한 것이어서야 되겠느냐’는 데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뒤뚱거리며 아장아장 흙을 밟는 아이를 지켜보며 성미산이 집 근처에 있어서 얼마나 축복인지를 생각한다.

사람은 생애의 95% 이상을 실내에서 보낸다던가. 도시에서 살고 있는 우리 생활을 돌아보면 꼭 과장된 수치만은 아닌 듯하다. 이럴 때 성미산은 내게 자연의 숨결을 느끼게 해 주는 소중한 보물임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성미산은 굳이 오르지 않아도, 그냥 잠시 들러 안부를 묻는 것으로 족하다. 마음먹고 하루를 비워 오르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편안한가!

지난 2년여 동안 ‘성미산 지키기’ 운동이 언론에 오르내린 덕에 성미산은 이제 제법 유명한 산이 됐다. 그러나 그 명성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은 산의 작고 볼품없는 모습에 또 한번 놀란다. 성미산은 서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동네 뒷산이기 때문이다.

산 입구의 텃밭, 곳곳의 운동기구와 훌라후프, 배드민턴장, 산책 나온 개와 그 주인, 운동하는 어르신들, 놀러 온 어린아이들…. 그 흔하디흔한 아까시나무와 현사시나무까지도 동네 뒷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이런 작은 산이 내게 안식처가 된 것은 사실 나도 모르는 사이였다. 동네 아이들과 꼬박꼬박 산으로 나들이를 가다 보니 예쁜 꽃들이 피고 지며 한해 두해가 갔다. 그러면서 박주가리, 개망초, 애기똥풀, 등골나물 등의 이름들을 절로 알아 갔다. 산딸기꽃이 하얗게 피고나면 딸기가 열리는 날을 하루하루 기다린다. 성미산의 풀들로 비빔밥을 해먹은 날엔 ‘성미산이 우릴 먹였구나!’ 하며 내가 성미산의 딸이 된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선생님, 우리 오이풀 보고 가요.” 일주일에 한번씩 오건만 그사이 성미산과 정이 들어 버린 숲속학교 아이들은 오이풀이 잘 있는지 궁금해 한다. 얼마 전 모니터링을 하는데 개암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도깨비 뿔 모양을 한 재미있는 나무인데 본래 있던 자리에서 보이지 않아 마음에 걸렸다. 산책로가 점점 넓어지는 바람에 나무들이 설자리를 잃고 있다.

이렇게 정이 든 성미산은 내겐 자연을 보는 창이 된다. 아까시나무가 벌목된 자리에는 전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어린 가지들이 올라와 헝클어져 있다. 죽이려 하니 살고자 몸부림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환경과 생태에 대해 머리로만 하던 고민들이 성미산의 상처를 보면서 ‘나의 일’이 됐다.

회색 건물들만 가득한 서울에서 작은 뒷산은 사람들의 안식처이기도 하지만 씨앗과 새들에겐 생태계를 이어주는 생명의 징검다리이기도 하다. 서울시민들에게 지금 우리 동네의 작은 산에 잠시 들러 보길 권하고 싶다. 우리의 작은 관심이 서울의 생태계를 살리는 시작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제발 그분들이 산을 체육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약력 ▼

1973년생. 1998년부터 신촌지역 공동육아협동조합 ‘도토리 방과후’에서 교사로 일했고 지금은 14개월 된 아이를 키우느라 휴직 중이다. 2002년부터 토요일마다 서울 마포구에 소재한 성미산에서 ‘숲속학교’를 진행하고 있다.

고은주 ‘성미산 숲속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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