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간은 이상하게도 자신의 신체를 혹독하게 학대해 왔다. ‘신체’와 ‘정신’을 양분해 ‘내면’이니 ‘영성’이니 ‘양심’이니 ‘도덕’이니 하는 ‘정신’ 쪽을 추어올리거나, 지나치게 욕망 쪽을 강조해 결국 신체 자체를 ‘소외’시키고 죽여 왔다. 인류 역사는 자신들의 신체를 죽여 온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의 양차 대전, 21세기 초의 ‘9·11사태’와 ‘아프간 사태’, 최근의 ‘이라크 사태’ 등은 인류가 결코 과거보다 발전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근자의 미국 중심의 이른바 ‘신제국주의’와 중동의 갈등은 밑도 끝도 없이 전 인류의 신체를 파괴할 태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극(極)야만의 신체파괴 행위들이 ‘민주주의’ 등 아주 근사한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도 인간이 신체적으로 얼마나 ‘극악한’ 동물인지 잘 보여준다.
헤브라이즘, 헬레니즘, 이슬람 사상을 막론하고 서양과 중근동의 사상과 문화의 뿌리 속에는 놀랍게도 ‘갈등’과 ‘대립’의 논리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근원으로부터 오늘날 세계파괴의 논리가 나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논리와 실천은 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이쪽에서 생성된 연극은 ‘갈등’과 ‘지배-피지배’ 논리가 전체를 지배한다. 공연자가 청중과 관중을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공연자와 청·관중의 신체를 해방하는 구조와 양식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러한 병폐를 고치기 위해 20세기 서양의 공연 관련자들은 수많은 논의와 실험을 전개했지만 이렇다할 결과물을 얻을 수 없었다. 1999년 이 분야에서 가장 탁월한 실험과 실천을 보여준 연출가 그로토프스키의 사망은 그런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새 세기에도 그쪽에선 별다른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돈을 노리는 ‘대형 뮤지컬’만이 공연계를 지배할 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문제를 이미 한 세기 전에 해결해 놓았다. 무당굿, 풍물굿, 탈놀이, 판소리 등이 그것이다.
무당굿은 공연을 통해 삶과 죽음의 세계를 통합한다. 풍물굿은 서양인들이 최근에야 논의하기 시작한 ‘청중과 관중의 공연자화’를 몇백년 전에 성취해냈다. 탈놀이는 브레히트가 수립한 ‘이화의 원리’를 넘어서 ‘동화’와 ‘이화’의 원리를 조화롭게 통합하는 길까지 열어놓았다. 한 걸음 나아가 판소리는 서사의 평면과 음악의 평면과 극의 평면을 ‘소리’를 중심으로 결합해, ‘호모 퍼포먼스’로서의 인간이 이룩할 수 있는 가장 드높은 경지의 예술 세계를 이룩해냈다.
그런데도 20세기에는 이러한 한국의 공연예술 문화의 진면목을 아무도 깊이 주목하지 않았다. 21세기 세계 공연예술계의 새로운 길이 우리의 전통 공연예술로부터 모색되고 이룩될 날이 멀지 않았다. 그 한 단서를 윤호진의 ‘명성황후’가 이미 암시한 바 있다. 이 분야의 젊은 ‘스타’를 손꼽아 기다린다.
김익두 전북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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