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일요일 아침 강신호 전경련 회장과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골프장 식당에서 만났다. 이들이 나눈 대화록 가운데 ‘기업가정신’이라는 단어가 눈에 번쩍 띈다.
강 회장이 경제를 걱정하면서 “기업가정신의 쇠퇴가 가장 큰 문제”라며 운을 뗐고 이 부총리는 “창업형 기업인을 보기 어렵고 관리형 기업인이 득세하고 있다”고 맞장구쳤다.
용어를 정리해 보자.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에서의 기업가는 대체로 창업가를 말한다. 그래서 한자로 쓴다면 ‘企業家’보다 ‘起業家’가 더 어울린다. 기업가정신의 핵심은 ‘혁신’이다.
이병철, 정주영, 구인회, 김우중, 조중훈…. 창업 신화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의 영웅담은 정경유착의 산물이라는 비판도 있다. 공적을 부각하자면 이들은 놀라운 열정으로 도전했고 거대한 기업군(群)을 일구어냈다. 수만, 수십만의 일자리를 만들어냈고 국민 상당수가 그들이 창업한 회사에 몸담아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처럼 국민 대다수가 추앙하는 기업인 수준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한국에선 왜 존경 받는 거목(巨木) 기업인이 탄생하기 어려울까. 정부, 정치권 등 권부(權府)의 발목잡기가 큰 걸림돌의 하나이리라. 반(反)기업 정서가 여전하고 기업인을 깔보는 사농공상(士農工商) 인식이 상존하는 것도 요인일 것이다.
기업이 커가면 거의 틀림없이 정치권에서 손을 내민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갖은 ‘연줄’을 통해 협박성 부탁이 들어오면 어지간히 독한 마음을 먹지 않고는 정치자금을 주지 않을 수 없다. 전쟁처럼 치열하게 벌어지는 국제경쟁에서 ‘올인’해도 힘이 달릴 기업이 이런 일로 신경 쓰면 경쟁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정치인에게 돈을 준 탓에 기업인들은 교도소에 가기도 한다. 이 때문에 기업인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지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어느 건설업체 창업자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공무원을 찾아가 사무실 바닥에 실제로 무릎을 꿇고 빌어 결재 도장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돈뭉치를 들고 갔음은 물론이다. 정당한 법절차를 밟은 아파트 공사라 당연히 허가해줘야 하는데도 생트집을 잡더라는 것이다. 거액의 법인세를 내는 기업인이 이런 푸대접을 받으니 피눈물을 흘릴 노릇이란다. 국내 명문대를 나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준비하는 아들에겐 사업을 권유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한다. 수모(受侮)를 2대에 걸쳐 당하기 싫어서….
중소기협중앙회가 중소기업 오너 323명을 대상으로 ‘현 사업을 2세에게 물려줄 생각인가’라고 질문했더니 75.2%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경영학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그의 저서 ‘넥스트 소사이어티’에서 “기업가정신이 가장 돋보이는 나라는 한국”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지금도 그럴까. 아니다. 창업, 투자, 혁신, 연구개발(R&D), 창의성 등 미래 지향적인 가치가 쇠락해가고 있지 않는가.
더욱이 노무현 정부의 지난 1년간 경제정책은 이런 가치를 오히려 훼손시키지 않았는가. 한국경제를 살릴 주역은 누구인가. 참된 기업가정신을 가진 기업인이 아닌가. 이들이 일자리를 만들어야 ‘이태백’들의 젊은 꿈이 피어날 수 있다. 이들의 기업이 국제경쟁력을 갖춰야 한국경제가 살아갈 수 있다.
진정한 기업가들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린다.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처럼 구원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한국경제는 끝장이다.
고승철 편집국 부국장 che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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