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조경진/사라지는 골목, 사라지는 文化

  • 입력 2004년 3월 26일 18시 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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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종로1가 청진동에는 대형 건축물이 들어서고 있다. 이제 종로는 빌딩 숲 사이에서 숨 막힐 지경이 될 것이다. 청진동은 ‘피맛골’이라 불리는 오래된 골목길이 있었던 장소다. 조선시대에 종로 대로로 다니던 고관대작의 말을 피해 평민들이 다녔다는 데에서 피마(避馬)라는 이름이 유래한다. 폭 2m 정도의 좁은 길에는 누구나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값싼 음식점과 선술집이 많이 있었다. 그곳은 서민의 애환이 서린 곳이었다.

한때 청진동은 출판사와 잡지사들이 모여 있어 문인들이 즐겨 찾던 문화공간이기도 했다. 시인 고은은 ‘나의 청동시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청진동은 1960년대 한국문학의 가장 중요한 무대이며 새로운 지성의 특구였다.” 도시재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청진동의 허름하지만, 정취 있는 뒷골목은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문화예술인들이 피맛골의 보존을 외쳤지만 거대 자본의 힘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청진동 옆 종로2가에서는 ‘종로업그레이드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서울시 주도로 간판을 새로 바꾸고, 가로 시설물을 교체하는 가로 환경 개선 작업이다. 이 같은 업그레이드도 좋지만 있는 것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600년의 역사를 가진 소중한 도시 공간 ‘작은 골목길’을 왜 꼭 파괴해야 한단 말인가. 파괴와 개선이 한 발치 앞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종로에서 목도하고 있다. 거대한 개발 앞에서는 무력하고, 작은 개선에 안주하는 이중적 잣대가 우리의 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골목길이라는 도시공간을 보존하는 데에 인색했다. 서울은 조선시대부터 골목길이 큰길의 바로 뒤에 면해 있는 가로(街路) 구조를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그 골목길은 대로가 기능하게끔 지원하는 역할을 해 왔다. 대로변에는 상가와 사무실, 고급 레스토랑과 카페가 들어서는 반면 골목길에는 밥집, 술집, 가게 등 허름하지만 생활에 꼭 필요한 업종이 들어선다. 대로가 화려한 주연이라면, 골목길은 성실한 조연인 것이다. 골목길이 있어야 도시의 매력이 있고, 골목길이 있어야 도시의 표정이 풍부해진다. 진정한 도시의 일상은 이런 뒷골목에 존재한다. 번듯한 건축물만이 아니라 소박한 일상의 길도 우리가 보존해야 하는 문화인 것이다. 그것은 특정계층에 의해 점유되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는 보고(寶庫)다.

피맛골이 잘려 나간 청진동에는 지하 7층, 지상 20층의 거대한 건물이 들어선다. 개발 주체도 비판을 의식했던지 옛길의 흔적을 살리고자 기존의 골목길을 확대하고 전통음식점 위주로 꾸밀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층빌딩 앞에 새롭게 태어날 현대식 길은 예전의 피맛골 문화를 담기에는 미진하기 짝이 없다. 우리의 청진동은 이미 추억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보존이라고 하면 건축의 외관이나 길의 모양과 같은 물리적 형태에만 집착한다. 진정 보존해야 할 것은 길에 담겨 있는 삶이고 문화다. 길의 모습을 남겨 두었다고 해서 보존했다고 자위할 수 없다.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어떻게 이전의 문화를 담을 것인가? 이것은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다. 문화적 상상력이 요구되는 일이다. 대한민국의 문화역량은 그것을 해결할 만큼의 수준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조경진 서울시립대 교수·조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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