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 칼럼]특목고의 비애

  • 입력 2004년 4월 2일 18시 37분


지방자치단체들의 특목고 유치 열기가 뜨겁다. 경기도는 특목고 16개교를 새로 설립해 ‘특목고 벨트’를 조성하겠다고 나섰고, 서울시는 15곳에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를 신설한다는 구상이다. 현재 전국에 외국어고 과학고는 모두 39개교가 있는데 계획대로라면 수도권에서만 그에 육박하는 31개교가 새로 문을 열게 된다.

전국적인 ‘특목고 붐’에는 지역 주민들의 소박한 꿈이 담겨 있다. 서울 강남만큼은 아니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의 교육여건이 개선되고 자녀들에게 보다 나은 공부를 시킬 수 있길 바란다. 교육여건이 좋아지면 살고 있는 아파트 값도 오를 것이라는 기대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잘 살아 보고픈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과연 특목고 유치가 이런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지자체의 중대한 착각 ▼

특목고는 외국어와 과학 영재 등을 키우는 학교로 출발했지만 평준화 체제의 보완수단이기도 했다. 학교선택권이 배제된 평준화 체제에 숨통을 터 주자는 의도였다. 우수 학생들이 모여들면서 특목고라는 말은 어느새 명문고와 같은 의미가 됐다. 지자체들이 특목고를 유치하려는 배경에는 강남의 명문고와 같은 학교를 가져 보겠다는 욕구가 들어 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학교선택권을 인정하는 특목고는 평준화 체제에 모순되는 학교임이 분명하다. 여기서 특목고의 비애가 시작된다. 특목고는 입시제도가 바뀌는 데 따라 여러 번 부침(浮沈)을 겪었다. 재학생들이 무더기로 자퇴하는 사태도 벌어졌고 중학생들이 지원을 꺼리는 일도 있었다.

대학입시는 전국 고교가 동일한 학력 수준을 갖고 있다는 전제 아래 시행된다. 학생 수가 많은 강남의 학교나 수십명에 불과한 시골학교나 1등을 한 학생은 같은 1등으로 간주된다. 수능시험 같은 전국적인 평가 때는 문제가 없지만 학교별 내신을 산정할 때는 다르다. 지역에 따라, 특목고냐 일반고냐에 따라 실력이 월등하게 높은데도 내신점수는 반대로 낮게 나올 수 있다. 공부 잘하는 특목고 학생들이 당하는 불이익이다.

교육부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서울대 같은 대학은 정부 방침에 따라 내신을 많이 반영하기 때문에 특목고 학생들에겐 ‘넘기 힘든 벽’이다. 수능 점수와 면접 점수를 높게 받아도 내신이 낮아 낙방하는 일이 흔하다. 실력이 우수한데도 입시규정 때문에 특목고 학생을 뽑을 수 없는 대학도 안타까울 것이다. 특목고 학생들이 이런 불합리한 결과에 마음속으로 승복할 리 없다.

엊그제 EBS 수능 강의를 시작한 교육당국은 ‘비장의 카드’를 준비 중이다. 2008년부터 입시를 내신 위주로 치르겠다는 것이다. 가히 ‘폭탄선언’이다. 거주지의 교육여건이 좋은 게 오히려 입시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고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는 거의 치명적이다.

내신에서 절대 불리한 특목고에 자녀를 보낼 학부모는 없다. 전국의 외국어고 교장들이 최근 모임을 갖고 “앞으로 외국어고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반발한 것이 전혀 엄살로 보이지 않는다. 지자체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 특목고를 유치하려는 것인지 궁금하다.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려면 일부러 교육여건이 안 좋은 곳으로 이사해야 할 판이다.

▼엘리트 교육은 어디에 ▼

최근 교육 정책은 엘리트와 엘리트 교육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차 있다. 정부는 특목고와 자립형 사립고를 활성화하겠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서울대를 없애고 수능시험을 폐지하려는 움직임도 그런 예이다.

물론 특목고가 엘리트 교육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과학고에서 양성된 인재가 이공계 위기 극복에 힘이 되듯이 영재 교육의 필요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엘리트 교육을 인정하고 그와 별개로 교육 기회를 균등하게 하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을 터인데 꼭 어느 한쪽을 희생시키겠다는 것은 무모한 ‘편 가르기’다. 엘리트 교육을 부정하면 국가 위상의 후퇴는 각오해야 한다.

특목고로 교육여건을 높이려는 서민의 꿈은 이제 접어야 할 것인가. ‘미운 오리’ 특목고 학생들의 축 처진 어깨는 누가 두드려 줄 것인가.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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