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직업은 독일말로 ‘오르겔바우(Orgelbau)’, 다시 말해 ‘파이프오르간 제작’이다. 이 작업에 발을 들여놓은 지 19년째다. 아직 이뤄 놓은 일이 미미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바빠진다. 동시에 유럽 문화의 우월감의 표상일 수도 있는, 그런 일을 배워 왔다는 점에 마음 한쪽이 찜찜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요즘 나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왕산악이나 우륵 등의 선조들이 서역에서 넘어온 악기들을 한국화해 신명나는 문화로 만들어 낸 것처럼, 어느새 우리 곁에 다가온 파이프오르간을 이제는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라스피나스 성당에는 아주 유명한 파이프오르간이 있는데, 핵심 부품인 파이프를 전부 그 동네 야산에서 자라는 대나무로 만들었다. 늘 바람결에 듣던 뒷동산 대나무 통의 울림을 통해 전달되는 음악은 필리핀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올 것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서양음악이건 필리핀 토속음악이건 관계없다. 그들은 이방에서 넘어온 문화를 자기 문화로 재창조해 낸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유럽에서 수십 세기에 걸쳐 전승된 파이프오르간은 나름대로 고유한 소리 색깔을 갖고 있다. 동네마다 소리가 다르다. 오스트리아의 그것은 소리가 유달리 높고 이탈리아의 그것은 왠지 흐리멍덩하다. 악기의 이름은 같은데 모양과 소리가 판이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들은 끊임없이 자기 땅에서 나는 소리를 파이프의 울림으로 형상화해 거기에 그들만의 문화를 담아 낸 것이다.
언젠가 세종대왕의 ‘수제천’을 들으며 ‘파이프오르간으로 이 음악을 연주한다면…’ 하는 생각이 솟구쳐 주체하지 못한 적이 있다. 생황 대금 퉁소 아쟁 해금 나발 태평소…. 우리가 다가서기에 거리낌이 없는 그 정겨운 소리들로 파이프오르간의 통 속을 가득 채운다면….
소리는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닮아간다. 늘 피리를 가까이하고 음악에 남달리 관심이 많은 우리 민족에게 이 악기는 보다 더 넓은 ‘영혼의 밭’을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파이프오르간을 구성하는 ‘피리’들, 그 자체가 이미 우리의 악기가 아닌가.
꿈은 꾸는 것보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한다. 후세대가 이어갈 수 있도록 도제들을 키우는 것이 나의 꿈이다.
우리의 철학을 갖고 우리의 손으로 한국 땅에서 만들어지는 이 악기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문화로 자리매김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오늘도 나는 황학동과 청계천으로 간다.
홍성훈 파이프오르간 제작자
약력 : △1959년생 △1986년 독일로 가 1997년 파이프오르간 제작자(Orgelbaumeister) 국가시험 합격 △1991년 120년 전통의 ‘요하네스 클라이스 오르겔바우’ 입사 △1998년 귀국했으며 현재 ‘홍성훈오르겔바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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