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포럼]최원식/이라크 파병의 덫

  • 입력 2004년 7월 4일 19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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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설마 괜찮겠지 하며 짐짓 마음을 다독이던 우리에게 긴급으로 날아든 김선일씨의 비보! 너무 큰 놀람에 말이 끊어진 그 찰나의 무서운 침묵을 잊을 수 없다. 그 침묵은 복합적이다. 살고 싶다고 절규하던 한 젊은이의 가엾은 죽음에 대한 측은함, 참수라는 끔찍한 방법으로 민간인을 살해한 이라크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절망, 막연한 낙관 속에 파병 원칙만 거듭 다짐하며 정작 구출에는 무능했던 우리 정부에 대한 실망, 나라를 저 지경으로 만든 후세인과 그를 빌미로 대책 없이 전쟁을 일으킨 부시에 대한 분노 등등, 복잡한 감정선이 주마등처럼 흘렀다.

비보는 우리로 하여금 이라크 사태에 대한 직면을 요구한다. 미군 군납품 수송업에 종사하면서 이라크 사태의 진상에 고뇌하던 한국 청년의 목숨을 앗아간 이 사건으로 우리 사회는 파병의 심각성을 목숨의 문제로 실감하게 된 것이다.

▼美요구 수용할 수밖에 없는 정부▼

비보 직후 파병 찬성론자가 증가하였다고 한다. 그 중에는 복수를 위해 즉각 파병해야 한다는 격정적 반응도 없지 않았다. 한국 안의 이슬람성원에 대한 경계를 강화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곧 진정된 듯싶어 다행인데, 자칫 이슬람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일로 비화될 수 있는 이런 즉물적 반응은 합리적 판단이라고 할 수 없다. 옛글에 병(兵)은 흉(凶)이라 일렀다. 설령 최고의 ‘정의의 전쟁’이라 할지라도 군대를 일으키는 일은 사람의 목숨이 관계되는 중차대한 결정이기 때문에 현명한 지도자들은 최후의 선택으로 두어 온 터이다.

더구나 이라크전쟁은 점점 제2의 베트남전쟁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후세인 독재를 옹호할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부시의 공격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상기하면 우리가 이라크 사태에 미국의 요구에 응해 개입할 하등의 명분이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김선일씨의 죽음을 기폭제로 파병 반대 행동도 다시 고조되고 있다. 반미는커녕 미국에 대한 작은 비판조차도 하나의 성역으로 봉인되었던 과거를 생각하면 최근 한국 시민사회의 성장은 괄목할 만한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우리 정부도 미국의 파병 요청에 당당히 “No”라고 선언하면 작히나 좋으랴. 그러나 나는 미국의 요구를 수용한 정부의 파병 결정을 일방적으로 비판하지 못한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鄧小平)이 당분간 미국과 다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얘기를 흥미롭게 들은 적이 있다. 유언의 진위를 떠나 중국 지도부가 미국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관찰컨대 그럴 듯하다. 저 덩치의 중국도 지금은 빛을 감추고 미국에 순응하는 양, 힘을 기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덩샤오핑의 지침에 기반한 중국 외교부의 숨은 구호 ‘도광양회(韜光養晦)’다.

한국은 어떤가? 자국 영토 안에 주둔한 미군과 분단 한반도의 북부에 존재하는 북한의 현전(現前)이 끊임없이 환기하듯이, 한국의 주권은 충분한 의미에서 온전하다고 얘기하기 어렵다. 6·15 이후 순항하던 남북관계를 일거에 후퇴시킬 수도 있는 북핵 문제는 한국 정부의 운신을 제약하는 또 하나의 변수다.

▼明요청 파병 최대한 늦춘 광해군▼

이 진퇴양난의 국면에서 나는 광해군(光海君)의 파병을 기억하고 싶다. 중원을 둘러싼 명과 후금(청)의 투쟁이 아직은 결판이 나지 않은 절체절명의 중간시간대에 서서, 임진왜란에 파병한 명의 성화같은 독촉에 응하는 일변, 후금의 실력을 예의 가늠하면서 정작 파병 일정은 최대한도로 늦춰 잡았던 광해군의 나라의 운명을 건 현실주의! 전쟁 재발을 억지하기 위한 광해군의 고심참담한 결단과 친명정책을 표방하여 병자호란을 불러들인 인조(仁祖)의 무모, 우리는 지금 누구에게서 배울 것인가?

우리 병사와 민간인의 안전을 위해서, 그리고 이라크의 재건에 기여한다는 파병의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도 파병 문제 전반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요구되는 것이다.

최원식 인하대 교수·한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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