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은사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고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정도로 당황스러웠다. 명색이 국어를 연구하는 사람인데 그 물음에 선뜻 대답할 수 없다는 게 적잖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속손톱이라고 한단다.”
프랑스에는 국민의 언어사용을 감찰하는 사복경찰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놀란 적이 있다. 이들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간판 등에서 프랑스 말이 잘못 쓰이는 현장을 찾아내서 법적 처벌을 내릴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언어 경찰’이 우리나라에도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고속으로 돌리는 무성영화 필름처럼 이곳저곳 딱지 떼기에 바쁠 경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얼마 전부터 대학의 국어 수업시간에 맞춤법에 관련된 시험문제를 출제하지 않기로 했다. 점수를 올려주어도 맞춤법 문제로 시험을 내면 절반의 학생들이 낙제를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실력을 갖고도 별 문제 없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긴 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시간에 방영된 한 시민단체의 시위장면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인텔리 계층에 속하는 그들의 시위에는 ‘추가 파병 왠 말이냐’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이 등장했다. ‘왠 말’이라는 버젓이 틀린 표기를 보고도 개의치 않을 만큼 한글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이미 무뎌졌다.
저명한 영국 언어학자 데이비드 크리스털은 2050년이 되면 세계 언어의 최상층부를 이루는 대언어는 중국어, 힌디(인도)어, 영어, 스페인어, 아랍어 등 5, 6개 정도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이러한 예측에 언어사용자의 수, 해당 언어 지역의 경제력, 그 언어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 등을 종합적 평가지수로 사용했다. 그렇게 되면 한국어의 운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아직은 7000만 한민족이 한국어를 사용하고, 해외교포들이 한국어를 잊어버리지 않고, 또 한국어를 배우려는 해외의 한국학 열기도 있으니까 우리는 모국어 생존의 안전지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살아남는다는 것에 위안을 받을 수는 없다. 영어공용화를 실시하는 필리핀에서 타갈로그어는 여전히 쓰이고 있다. 그러나 타갈로그어는 필리핀 사회에서 이미 지성과 학문의 언어가 되지 못하고, 공식적인 언어가 되지 못하고 있다. 몇몇 필리핀 사람들이 타갈로그어를 살리자고 외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영어를 대신할만한 사회적 지위를 되찾지는 못한다. 이미 복구의 대상이 된 언어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한국어가 잘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영어 조금 덜 쓰고 고유어는 살려 쓰자는 오랜 피해의식에 호소하려는 게 아니다.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한국어 연구를 하자는 적극적인 노력을 말하려는 것이다.
21세기에는 컴퓨터에서 살아남는 언어가 멸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앞으로 언어의 생명력은 어떤 언어가 얼마나 컴퓨터와 대화할 수 있는가, 얼마나 자동 번역될 수 있는가 하는 언어공학의 수준에 달려 있다. 그 연구를 위해 전문 인력들이 지혜를 모아야 하겠지만, 이러한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한국어에 대한 우리 개개인의 작은 사랑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하지 않을까.
정주리 동서울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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