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삶]황덕명/농사는 평화를 향한 기도

  • 입력 2004년 9월 6일 18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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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 수문이 마지막으로 열렸다 닫히며 너른 벌판의 긴 수로에 물이 끊기면 농부들은 ‘이제 농사 다 지었다’며 한시름 놓는 때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벼 베기와 논 매무새를 고려해 논두렁 풀을 한번 더 깎고, 벼보다 웃자란 얼마의 돌피마저 남 보기 부끄럽다며 굳이 논에 발 담그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누렇게 변해 가는 벌판의 색깔에 도취된 얼치기 농투성이는 잠시 상념에 젖는다.

이 평화로운 풍경의 온전한 주체는 분명 농부가 아니다. 햇살과 바람과 비를 머금은 자연의 이치가 주체다. 그러나 이 풍경을 만드는 데 일조한 농부들의 마음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 그 마음의 원천은 농사짓는 행위 그 자체이고 그것이 내가 농부들의 종교라 규정하는 평화(平和)의 모태다.

못자리를 하기 전부터 농부들은 일을 시작한다. 우선 추수 때 골라 놓은 종자 볍씨를 자식 키우듯 애지중지 까락(볍씨에 붙어 있는 수염)을 털어내고 달걀이 지구처럼 기울어 뜰 정도의 소금물에서 한 번 더 골라낸다. 이것을 병해충에 잘 견디라고 따뜻한 물에 열탕 소독을 한다. 그리고 며칠 밤낮을 찬물에 넣었다 뺐다 하며 담금질한다. 이 과정은 논에서 본격화되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장엄한 순간이다. 대지로 나가 제자리를 잡아야 하는 볍씨에 이렇게 정성을 들이는 것은 첫 관계에 대한 농부의 간절한 기도다.

볍씨를 기를 모판 놓을 못자리를 할 때에, 논에 물을 대고 갈고 나서 농부가 제일 신경 쓰는 일은 논의 수평을 맞추는 일이다. 물을 거의 빼고 모판 두 개가 가로 놓일 정도의 판장을 만드는 일 역시 수평이 중요하다. 그래야 모판에 담긴 볍씨가 물을 고루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농부는 삽으로 흙을 돋우고 걷어내고 하며 판장을 고른다. 문득 내가 만나는 농부들의 심성이 대개 평화롭고 사람 관계에서 평형을 유지하는 이유가 이 못자리 만드는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물을 대는 것은 배려다. 수평을 맞추는 것은 평화이고 균형이다. 추수 무렵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도 자신의 정성을 탓하는 자세는 자연에 대한 순응이고 겸허함이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이 행위가 사람의 심성을 조화롭게 가꾼 것은 아닐까. 그저 앞으로 속도만 내는 일에 익숙한 사람들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농부들에게만 가능한 삶과 자연의 조화이리라. 자연과 함께하는 농부들에게 주어진 신의 은총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농부들은 사는 것 자체가 기도이고 농부들의 삶의 모습이 바로 종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나는 농부들의 종교는 평화라고 믿는다. 평화의 화(和)가 쌀이 입에 들어가는 모양인 것은 차라리 부차적인 설명이다. 오로지 농부들의 삶이 바로 평화고, 그들의 종교다.

나는 이제 불과 여섯 해 이 종교에 귀의하려고 애쓰는 애송이 농부다. 이맘때만 되면 나는 언제나 아프다. 도대체 내가 알곡을 여물 게 하는 데 뭐 한 일이 있는가 하는 자괴감 때문이다. 바람과 햇살과 물의 고마움에 그저 고개 숙여 감사할 따름이다. 바람이 있다면 게으름 피우지 않고 농부들의 평화를 온전히 배워 내 삶의 종교로 삼는 길에 제대로 서고 싶을 뿐이다.

황덕명 ‘내일을 여는 책’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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