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고민을 한 다음 날 새로운 삶이 열릴 것 같다는 떨림을 안고 대학원을 찾아갔고 운 좋게 합격했다. 그리고 국제회의 기획 분야에서 빨리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8년여 세월을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나 실무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마케팅, 기획, 실행까지 총괄하는 관리자 역할을 한다는 것은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으로 20대를 보낸 30대 중반의 유부녀에게는 유치원생의 대학원 공부만큼이나 벅찬 것이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중도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실무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닥치는 대로 관련된 일을 병행했지만 모자람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처음으로 작성한 제안서를 클라이언트가 보고 ‘잘 쓴 대학생 리포트’ 같다고 평가하며 미심쩍어 하는 시선을 보냈을 때의 암담함. 처음 참여한 입찰 경쟁의 제안서 제출 날짜가 하필이면 설 연휴 다음날이었다. 고향에도 못 간 동료와 함께 온갖 상황을 머릿속에 시뮬레이션 해가며 제안서를 작성했지만 또다시 ‘리포트’ 같다는 말에 처음부터 다시 했던 일…. 맡은 행사의 성공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고 그동안 일에 대한 열의와 노력이 남다른 사람들도 만났다. 덕분에 이젠 믿고 같이 일하고자 하는 층도 제법 생겼다.
2001년 충북 오송 바이오엑스포 컨벤션을 기획하기 위해 벤치마킹하러 간 미국 샌디에이고의 ‘바이오 컨벤션’은 내 눈을 뜨게 해준 행사였다. 그 행사는 정보기술(IT)을 대표하는 전시회인 세빗(CeBIT)처럼, 생명공학(BT)기술이 신생 산업으로 뜨자 미국 바이오산업협회가 주축이 되어 만든 행사로 당시 2년째 열리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미국은 바이오 분야의 종주국임을 확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바이오 분야의 최신 정보와 교류를 위해 1500달러에 가까운 등록비를 기꺼이 내고 유명한 연구자, 기업 관계자들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와 서울 코엑스보다 더 큰 컨벤션센터를 가득 메운 모습은 국내에 유치된 국제회의의 진행 대행 수주에만 몰두해 있던 나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우린 왜 이런 행사를 만들지 못할까.” “이렇게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브랜드 컨벤션을 만들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당시 내 화두는 이런 것이었다.
그 뒤 많은 행사를 치렀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그것이 나만의 화두가 아님을 확인했고, 최근 비슷한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과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됐다. 그 꿈이 이뤄질지 아니면 중도에 변질될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다. 최선을 다해 그 길을 가다 보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다.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컨벤션’을 꿈꾸며….
▼약력▼
△1964년 생, 이화여대 독어독문학과 졸, 한림대 국제회의학 석사 △FM커뮤니케이션즈 컨벤션사업본부장 등 지냄 △서울시 국제경제자문단 총회 등 진행
한신자 PMP코리아 컨벤션·전시부문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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