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천재 스즈키 이치로가 조지 시슬러의 미국 메이저리그 시즌 최다안타 기록 257개를 84년 만에 깨자 일본열도는 열광했다. 아사히신문은 ‘해냈다, 이치로’라는 사설에서 ‘역사를 만들었다’는 미국 언론의 최대 찬사도 부족하다고 평했다.
▼억분의 1m에 승부 갈리는 시대▼
아사히는 또 “이치로의 쾌거는 무엇보다 일본 한국 대만 등 아시아 선수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을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천부의 재능에 갑절의 노력이 “위대하다”고 연발했다. 257개의 벽을 깬 그 일구(一球)가 일본인에게 심어준 자부심, 자존심, 자신감의 값은 얼마나 될까.
박세리는 미국 진출 첫 해인 1998년 5월 세계여자골프 맥도널드챔피언십에서 3타차(273 대 276)로 2위를 제쳤다. 골프 사상 최연소 메이저대회 우승기록이던 타이거 우즈의 20세 8개월 23일을 1개월 3일 앞당긴 대기록이기도 했다. 뉴욕 타임스는 박세리를 ‘한국 최고의 수출품’이라 칭했다.
50일 뒤 박세리는 US오픈 우승컵도 안았는데, 제니 추아시리폰과 290타 동타 뒤에 펼친 연장라운드는 숨 막히는 드라마였다. 18번홀 티샷 볼이 연못 턱에 묻히자 박세리는 양말까지 벗고 종아리를 물에 담근 채 볼을 쳐내 결정적 위기를 넘겼다. 그날의 승리는 외환위기에 시달리던 국민에게 한 줄기 희망을 안겼다. 햇볕에 그을린 다리 아래로 드러낸 하얀 두 발목을 많은 이들이 아직 기억하지 않을까.
이번 아테네 올림픽 남자 100m 달리기에서 저스틴 게이틀린의 금메달과 프란시스 아비크웰루의 은메달을 가른 시간은 0.01초였다. 그 찰나 그 반 뼘의 승부에 지구촌은 탄성을 질렀다.
삼성전자는 회로선의 폭이 60나노미터인 반도체 신제품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차세대 반도체시장을 선점하게 됐다. 1나노미터는 10억분의 1m다. 최대 경쟁사인 인텔의 현재 주력은 70나노미터 제품이다. 10나노미터를 줄인 극미세(極微細) 차이와 몇 달의 개발시차가 만들어 낼 이익효과는 1조원 안팎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렇게 처절한 우열승패(優劣勝敗)의 세계다. 개인 기업 국가 할 것 없이 이런 무한경쟁을 거부하거나 포기하면 다 죽지는 않을지라도 앞설 수는 없다. 승자와 패자가 간발의 차로 갈리고, 이기지 못하는 것은 곧 살아남지 못하는 것을 뜻할 때가 많다.
이 같은 세상인데 한국에선 지금 평등주의가 판친다. 말인즉 ‘고루 잘살고 함께 선진하는’ 평등이란다. 과연 그럴까. 앞서는 자의 발을 걸어 뒤쪽과의 간격을 좁히고, 가진 자를 공격해 못 가진 쪽으로 내려오게 하는 하향평등 아닌가.
대학수학능력시험 전국 1등과 2만4000등을 같은 등급으로 쳐주는 대입 제도까지 개발됐다. 거기다 내신성적 80점으로 전교 30등이 될 수 있는 학교의 학생이 90점으로도 50등인 학교의 학생보다 유리한 제도다. 이런 무차별과 역차별로 ‘잘하는 소수’ 아닌 ‘그 후위(後位)의 다수’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포퓰리즘의 승리’는 누군가가 맛볼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교육으로 ‘동북아 중심국가’ ‘미국과 대등한 나라’를 꿈꾼다면 헛꿈이다.
▼평등주의가 만들 下等국가▼
우리 경제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성장잠재력 침하의 위기다. 올해와 내년의 성장률 전망치가 세계 평균보다 낮다. 이래선 고용도 복지도 어렵다. 성장력을 만회하려면 생산성을 높여야 하는데 그 동인(動因)이 능력주의(경쟁), 사유재산권 보호, 개방 등이다.
하지만 온갖 분야가 평준화, 아니 평둔화(平鈍化)의 압력에 시달린다. 주택 같은 사유재산도 공공재(財)라 우기는 사람들이 득세했다. 개방의 머리 위로도 민족이라는 이념이 떠다닌다. 그 낌새에 기업도 인재도 돈도 떠난다. 남는 것은 하등국가 아닐까.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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