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송성재]‘설렁탕體한글’ 언제까지

  • 입력 2004년 10월 8일 18시 13분


아침에 집을 나서서 귀가할 때까지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시각적 정보를 접한다. 매일 타고 다니는 버스 하나만 보아도 커다란 영문 이니셜과 노선 번호, 목적지 표시, 차체에 부착된 영화 광고와 의자마다 붙은 보습학원 광고, 심지어 번호판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것들은 의외로 많다.

이미지 시대라고 이야기들을 하지만 인터넷을 비롯한 현대 매체들 속에서 글자는 오히려 더욱 중요한 요소로서 비중이 커졌고, 공기나 물처럼 또 하나의 환경적 요인이 됐다. 도로 표지판을 빼곡하게 메운 커다란 글자들은 운전자들의 안전과 편리성을 담보할 뿐 아니라 도시의 인상도 좌우한다.

아파트 상가나 소위 먹자골목의 간판 글자는 거리의 인상을 특징짓는다. 설렁탕과 해장국을 파는 식당의 간판은 전국 어디서나 거의 예외 없이 같은 글꼴로 디자인돼 있다. ‘디자인’과는 거리가 먼 이 글자들은 대한민국의 식당을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해장국체 또는 설렁탕체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제 나라 글자를 놔두고 왜 남의 글자를 쓰느냐는 핀잔을 들어가면서도 간판이나 패키지 등을 영문자로 구성하려는 경우가 적지 않다. 디자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문자로서 영어를 선호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엉뚱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영어 알파벳의 글꼴이 시각적으로 한글보다 훨씬 조형적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한글은 창제 당시 당연히 세로쓰기였고, 그에 맞는 글자체로 창제됐다. 하지만 가로쓰기로 바뀌면서 그게 불편과 비효율을 초래하는 주범이 되었다. 가로획, 세로획, 동그라미와 사선만으로 낱글자들이 표현되는 한글꼴의 기본 도형은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간결하고 기하학적이지만 초성, 중성, 종성을 조합해 글자를 만들면 형태가 대단히 복잡해진다. 아래쪽에 놓인 받침은 가로로 읽는 흐름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글자 획의 밀도 차이로 인한 조형적 불규칙성도 초래한다. 이에 비해 영문자는 스물여섯 개의 글자만 디자인하면 되기 때문에 상황에 맞고 세련된 글꼴도 무수히 많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한글은 그 형태를 다듬고 적절히 적용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독일 정부는 모든 인쇄물에 힘 있는 블랙레터만 사용하도록 했다. 스위스는 중립국답게 아주 중립적인 느낌의 헬베티카체를 주로 사용한다. 영국의 신문 더타임스를 위해 개발된 타임스 로만체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애용되는 문서용 글꼴이 됐다. 이렇듯 글꼴은 각각 그 나라나 한 집단의 이미지를 대변할 만큼 강한 힘을 가진다.

그런 마당에 우리의 자동차들이 터무니없이 큰 글자의 번호판을 달고 거리를 누비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탁한 공기를 매일 마시게 하는 것과 같다. ‘설렁탕체’에 의해 점령된 거리는 울창한 숲의 식생이 황폐하게 바뀐 것과 마찬가지다.

글꼴 디자인과 이의 적용 및 시행 과정에서 이제는 전문가들의 심의와 개입이 필요한 때가 됐다. 디자이너들의 참여가 거의 없는 현재의 디자인 행정은 미래를 유보하는 것이다. 아울러 디자이너들은 누군가 자신들을 불러주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글꼴 빌보드’라도 작성해 발표하고 훌륭한 글꼴의 적용이나 개발 사례를 장려하는 일을 당장에라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송성재 호서대 교수·시각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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