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박4일에 걸친 ‘전력정책의 미래에 대한 시민합의회의’ 마지막 날인 11일 아침, 토론과 표결, 보고서 문안 작성으로 꼬박 밤을 새운 시민패널 대표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시민패널은 최종 보고서에서 전력정책 수립의 기준으로 친환경성, 공급안정성, 사회적 수용성의 세 가지 가치를 제시했고, 전력 이용의 효율성을 높이고 수요를 줄이기 위해 고효율 동력기기의 개발, ‘전력소비 총량제’와 ‘전력요금 선불제’의 도입 등 매우 구체적인 대안까지 제시해 해당 분야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합의회의(consensus conference)’란 시민패널에게 균형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충분한 토론과 숙의를 토대로 의사결정을 내리게 하는 시민참여 모형이다. 1980년대 후반 덴마크에서 처음 도입된 후 전 세계에서 실시되고 있는데 공청회나 국민투표와 달리 수개월에 걸쳐 해당 주제에 대한 집중적인 학습과 토론의 기회를 제공한다.
주제는 주로 생명공학, 원자력 등 첨단 과학기술 분야다. 인간에게 혜택과 재앙을 동시에 줄 수 있는 과학기술 정책결정에 고위 관료나 과학자들뿐 아니라 시민의 의견 역시 비중 있게 수용하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제도다. 유럽에서는 합의회의에서 내려진 결론이 의회에서 적극 반영된다.
한국에서도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유전자조작식품(GMO)과 생명복제에 대해 합의회의가 열렸다.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가 주최한 이번 경우처럼 모두 민간단체에 의해 진행됐다. 아쉽게도 유럽과 달리 합의회의 결과는 정책결정에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시민패널은 합의회의 전 과정에서 독특한 ‘학습체험’을 한다. 이들 가운데 애초에 원자력발전이나 전력정책에 대해 특별한 지식이나 관심을 가졌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령 성별 직업 지역 등을 고려해 선발된 패널들은 퇴직교사 회사원 사업가 농업기술자 주부 학생 등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3개월이 넘도록 예비모임 등을 통해 찬성과 반대쪽의 전문가들로부터 강의를 듣고 자료를 넘겨받아 공부한다. 동일한 과학기술 사안에 대해 상반된 전문가의 의견을 들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일은 상당한 집중력과 긴장을 필요로 한다.
또 시민패널은 자신이 옳거나 좋다고 생각한 것이 변화한다는 점을 종종 느낀다. 이번 합의회의 기자회견에서 패널은 “처음에는 원전에 반대했지만 토론을 거치면서 ‘아직은 필요하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현실적 필요를 인정하고 출발했는데 정부가 정보를 독점하고 일방적으로 국민들에게 원전의 필요성을 가르치려는 모습을 보고 생각을 달리 하게 됐다”는 등 입장변화 과정을 솔직히 밝혔다.
합의회의는 전력정책과 같은 복잡한 과학기술적 주제에도 시민참여가 가능하며, 보통 사람들의 상식이 균형 있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 시민패널은 “어떤 시민들이 이 자리에 와도 비슷한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합의회의는 이미 유효성이 인정될 단계라고 생각한다. 이제 국회나 정부가 나서서 합의회의와 같은 시민참여 방식을 제도화할 차례다.
김동광 참여연대 시민과학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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