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고 1년간 학원에서 러시아어 강사를 하다가 영어와 일어에 밀려 일을 그만두게 됐다. 과외로 생활을 해결하던 시절 나는 삶의 별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나보다 나이 많은 제자들이 나의 끼를 알아본 것일까. “연극이나 해보시죠”라고 권했다. 극단 아리랑에 입단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한다는 연극판. 6개월 만에 나도 폐병에 걸렸다. 낭만적인 점도 있었다. 많은 예술가들 역시 이 병에 걸리지 않았던가. 지하극장에서 살다시피 한 그 시절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자유롭고 행복했다. 서서히 나의 마음속에도 무지갯빛 꿈이 피어올랐다.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배우, 위대한 작가, 대한민국을 흔드는 연출가가 되리라.’
당시 김명곤 극단 대표가 뒤풀이 때 부른 성악곡 ‘쑥대머리’는 나의 욕망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단순한 ‘배우’가 아니라 ‘판소리 배우’가 되고 싶었다. ‘명창’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판소리는 ‘늪’이었다. 그 매력의 깊이를 어찌 헤아리며 그 다양한 면모를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극단에 휴가를 내고 무작정 광주로 방성춘 명창을 찾아갔다. 비워야 채워지는 이상야릇한 소리의 세계. 이게 어디 ‘소리’뿐이랴. 이상야릇한 우리 것의 세계가 점점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2001년, 우연한 기회에 전주산조축제 또랑광대 콘테스트에 출전하게 됐다. 부담 없어 좋았다. 추석연휴에 ‘노는 입에 염불한다’는 기분으로 10분짜리 새 판소리 ‘슈퍼댁 씨름대회 출전기’를 만들었다. 판소리의 줄거리는 슈퍼마켓을 하는 아줌마가 김치냉장고를 타려는 욕심에 씨름대회에 나갔다가 2등으로 미끄러졌으나 자식들은 2등 상품인 컴퓨터를 더 좋아해서 함박 웃었다는 얘기였다.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할 줄은 몰랐다. 아줌마들은 그야말로 울면서 웃었다. 또랑광대 콘테스트 이후 나의 별명은 ‘슈퍼댁’이 됐다.
판소리 공연이 끝난 후 관객들로부터 “어쩜 그렇게 내 속마음을 얘기하느냐”는 얘기를 들었다. 그 얘기는 나에게 ‘또랑광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향을 일러줬다. 대중의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광대. 높이 우뚝 선 무대가 아니라 바닥이 같은 ‘판’에서 대중을 모시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는 광대가 바로 또랑광대인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일요일마다 인사동 거리에 나간다. 그곳에서 소리판을 마련하고 사람들과 호흡하며 판소리 공연을 한다. 그곳에 서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얘기를 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지 알 수 있다. 또 그들이 얼마나 우리 것에 목말라하고 그리워하는지도 알 수 있다. 또랑의 모습이 다양하듯이 우리 것이 어찌 ‘소리’만 있겠는가. 나는 요즘 재담, 짓거리, 춤, 풍물 등도 배워나가고 있다. 판에서 살고 판에서 하나가 되는 ‘판 문화’의 회복을 위해서 오늘도 또랑광대는 흐른다.
▼약력▼
1966년생으로 1989년 한국외국어대 노어과를 졸업하고 1990년 극단 아리랑에 들어가 마당악극 배우로 활동하다가 판소리를 시작했다.
김명자 판소리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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