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최동규]큰 것이 좋다?

  • 입력 2004년 10월 22일 17시 57분


코멘트
‘큰 것은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올해 사상 처음 순이익 10조원을 돌파한 S전자, 그 뒤를 숨 가쁘게 추격하는 H자동차 등이 주목을 받는다. 땀 흘려 작은 이익을 낸 작은 회사는 존재조차 없다. 백화점도 쾌적하고 넓은 L, S백화점 등만 기억날 뿐 그 다음 규모의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문화를 표방한 게임에서는 경쟁보다는 공존이 제격일 텐데도 자본력의 싸움, 크기의 싸움이 판을 친다. 더구나 사활을 건 싸움이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싸움, 그 싸움에서 ‘작은 것’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건축계는 어떤가. 10년 전만 해도 큰 사무실과 작은 사무실이 공존하는 여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건축 불경기가 장기화하고, 경제상황이 불확실하다 보니 건축주들에게는 더욱 믿음이 가는 큰 사무실을 찾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됐다. 작은 사무실들은 점점 더 운영이 어려워질 것이다.

예전에 내가 건축가 김수근 선생 사무실에서 실습생 노릇을 할 때만 해도 12명 정도의 직원이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무엇인가 만들어 내려고 애썼다. 건축이란 많은 직원을 데리고 하는 일이 아닌 것으로 알았다. 건축가를 화가, 음악가, 소설가와 같은 반열에 놓고, 다만 건축 작업이 더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조직이다 보니 10명 남짓이면 적당한 규모인 것으로 머릿속에 입력된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몇백명이나 되는 설계인력을 거느린 소위 선단 규모의 대형 조직들이 설계비만 해도 몇십억원씩 되는 일들을 해치우고 있다. 세상이 변했으니 그런 대형 조직도 필요할 것이다. 문제는 큰 사무실의 일과 작은 사무실의 일이 나뉘는 것은 물론, 작은 일들도 큰 사무실에 가지고 가서 해주기를 바라는 경향이 심화되어 간다는 점이다.

규모가 제법 되는 건축설계 공모에서의 일이다. 한 건축사무실측이 “우리는 직원이 300명이고…” 하면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한다. 복잡하게 공모하고 말고 할 것 없이 우리에게 설계를 맡기면 안심할 수 있다는 뜻 아닌가. 여기에 “우리 사무실 인력은 12명입니다”라고 말을 꺼내면? ‘저렇게 작은 사무실에 우리 일을 어떻게 맡기지’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사무실은 큰 건물 실적이 없다는 이유로 고전을 거듭했다. 자본의 논리, 크기의 논리, ‘큰 것은 좋은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작은 것은 설 자리를 잃어간다.

댐을 보자. 큰 돌과 작은 돌, 모래까지 섞여야 커다란 둑이 서고, 물을 채울 수 있는 것 아닌가. 큰 돌만 있는 둑이 성립될 수 있는가. 모든 건축 일을 다 처리하는 큰 사무실 몇 개만 존재하는 사회는 어떨까. 작은 사무실과 큰 사무실이 공존해 건축문화라는 물을 가득 채울 수 없는 것일까. 건축계에까지 배어 들어온, ‘큰 것은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건축계 전반을 고사시켜 가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

삼성그룹이 서울 한남동에 세운 리움(LEEUM)에 가봤다. 마리오 보타, 렘콜 하스, 장 누벨 등 세 명의 저명 건축가가 세운 멋진 건축이다. 건축주는 그들을 선택할 때 사무실 규모를 보고 고른 것이 아니고 그들의 업적을 보고 골라냈을 것이다. 우리 건축계도 사무실의 크기만 보고 일을 맡기는 황량한 풍토가 바뀔 수는 없는 것일까.

최동규 서인건축 대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