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0일과 꿈/남기성]광대의 길 걷게한 관객의 눈물

  • 입력 2004년 11월 3일 18시 26분


1988년 추석 즈음의 어느 날 저녁, 인천 부평공단의,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한 공장 주차장. 100여명의 여성 노동자들 앞에서 마당극 ‘우리공장 이야기’ 공연을 막 끝낸 마당극패 ‘한두레’ 단원들은 징 소리에 맞추어 공연이 끝났음을 알리는 인사를 했다. 적막이 흘렀다. 여느 공연과 달리 관객의 반응이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이라서 관객들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순간 ‘뭐가 크게 잘못됐나’ 하는 불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중에 관객 대표가 나와 정리 인사를 할 때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그는 울음을 참느라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관객들이 울고 있었다. 그러느라 박수치는 것조차 잊은 듯했다. 누군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그 소리가 물결을 이루듯 관객들 사이를 퍼져 나가면서 어느덧 나를 비롯한 배우들도 함께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그랬다. 서울올림픽 준비로 온 나라가 들떠 있고 1987년 6월항쟁 이후 전국적으로 억눌려 있던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던 때였다. 놀이패 ‘한두레’는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작품을 만들어서 이들에게 보여 줬다. 자신들의 삶을 진솔하게 보여 주는 공연에 대한 그들의 열띤 반응은 거꾸로 공연을 한 우리 배우들에게 더 큰 감동을 가져다줬다.

그날의 공장 공연에서 내가 느낀 감동은 소위 ‘딴따라’의 길로 들어선 지 2년 만의 경험이었다. 군에서 제대하고 한동안 망설임과 마음고생 끝에 결정한 배우의 길이었기에 감동은 더욱 컸다. 특별히 ‘배우’로서 또는 ‘광대’로서 살겠다고 결심했다기보다는 그 시절 많은 내 또래 젊은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학창시절 ‘운동’의 연장선에서 선택한 삶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대학 졸업과 함께 직장 생활도 해 보면서도 무수히 갈등하고 방황하던 시기였다.

그날 한 시간 남짓 공연을 함께한 관객들은 20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 그 공연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까?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날의 그 충격적 느낌이 지금까지도 이 길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

안정적인 수입이 있을 수 없는 불규칙한 생활 속에서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옳은 길인지, 내가 제대로 된 인생을 살아 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그 노동자들의 빛나는 눈을 생각한다.

마당극단의 특성상 공장 한쪽에 마련된 허름한 공연장 외에도 여러 생활 현장에서 다양한 관객을 만났다. 그들과 함께 웃고 운 20여년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사회의 한쪽에서 소외받은 삶을 살고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다. 그들의 켜켜이 쌓인 이야기와 한숨이 있는 한 나는 무대를 떠날 수 없다. 아니 떠날 생각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려운 살림살이와 변변치 않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함께 극단을 꾸리고 있는, 형제보다도 더 사랑스러운 동지들이 있는 한 곰팡내 나는 지하연습실과 보잘것없는 무대지만 끝까지 지키고 싶다. 앞으로 20년 후 지금의 내 모습이 부끄럽고 후회스럽더라도….

▼약력▼

1963년생으로 중앙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잠시 회사원으로 근무하다 마당극에 뛰어들었다. 마당극 ‘밥꽃수레’ ‘칼노래 칼춤’ 등의 연출과 안무를 맡았다.

남기성 마당극패 한두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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