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마시는 것은 흐린 정신을 맑게 해 깨어 있기 위해서다. 산중에 살면서 늘 깨어 있지 않으면 아무도 간섭할 사람이 없으니 자신의 질서가 무너져 게으름뱅이가 되기 십상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슨 생각으로 무슨 행동을 하는지 늘 살펴볼 줄 알아야 한다. 이런 깨어 있음이 바로 성찰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올해 초에 좌우명 삼아 산중 처소 벽에 호미를 하나 걸어놓았다. 농부들이 논밭을 갈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하는지 자신을 지켜보고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산중에 살면서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는다는 식의 내 멋대로의 삶이 된다면 무엇보다 저잣거리에서 힘들게 사는 분들에게 빚지고 죄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생명이 있건 없건 이 세상의 모든 유·무정(有無情)의 존재들은 나와 한 뿌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뒷밭은 김장 배추와 무마저 뽑히고 나니 텅 비어 적막하다. 도라지와 더덕, 부추, 그리고 산에서 옮겨온 취도 된서리를 몇 번 맞고 나더니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지고 없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밭에서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것들의 뿌리는 땅속에서 봄을 기다리며 거듭나려 하고 있다. 내일의 성장을 위해 의미 있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불가(佛家)에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다. ‘봄바람과 여름철의 비는 만물을 생장하게 한다. 가을 서리와 겨울의 눈은 다시 만물을 성숙하게 한다.’
힘든 삶에 버거워하는 분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혹독한 시련에 시들거나 물러서서는 안 된다. 오히려 성숙으로 도약하는, 자신을 다지는 시간이 돼야 한다. 지독한 가뭄이 없다면 어찌 단비의 고마움을 알겠는가.
나는 지금 밭가에 심어진 매화나무를 보고 스스로 놀라고 있다. 오솔길을 내느라고 굴착기가 매화나무 두 그루를 다치게 했었는데 경이롭게도 여러 그루의 매화나무 중에서 유독 그 두 그루만 매화 꽃망울이 맺혀 있는 것이다. 나는 찢어진 가지들을 접골하듯이 끈으로 감아주면서 매화나무에게 경외감을 느낀다. 상처 받은 매화나무가 성한 매화나무들보다 먼저 꽃망울을 틔우고 있는 것이다.
중국 황벽 선사의 선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매서운 추위가 한번 뼈에 사무치지 않았던들/ 어찌 매화가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不是一番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
황벽 선사는 꽃 핀 매화나무를 보면서 매서운 추위야말로 깊은 향기를 얻을 수 있게 한 것이었다고 깨달았다. 누구라도 공감하리라 믿는다. 올해의 내 좌우명이 토굴 방 벽에 걸어놓은 호미 한 자루였다면 내년에는 황벽 선사의 이 구절을 삶의 지침 삼아 새롭게 태어나는 시간을 맞이하고 싶다.
정찬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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