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꼼꼼하게 그리는 까닭에 나는 이런 소리를 자주 듣는다. 한동안은 그저 칭찬해 주는 소리로 들었는데, 자주 듣다보니 이제는 “미련스럽게 고생만 많이 하네요”하는 소리로 들린다.
가깝게 지내는 선배는 보다 못해 “제발 삯바느질 좀 그만해”라고 쓴소리를 해댄다. “장인정신으로 그리는 거지 뭐…”하고 볼멘소리를 하며 얼버무리지만 실은 내가 더 답답하다.
아니, 내 고지식함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치밀하게 짜인 그림을 보면 처음에는 감탄을 하지만 곧바로 답답함을 느끼는 것 같다. 그 답답함이 나를 짓눌렀다. 직지심체요절에 이런 말이 있다. ‘불은 나무에서 생겨나 도리어 나무를 불사른다.’ 내 이야기였다.
서양화를 전공한 나는 ‘기초 다지기’라는 명분 하에 오랫동안 석고 데생을 해야 했다. 대학에 들어가 작품을 그리면서 난 늘 빽빽이 채워갔다. 빽빽이 채워진 그림 앞에서만 흐뭇했고, 그게 익숙했다. 졸업 후 출판사를 드나들며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리면서도 버릇은 여전했다.
한때 그림책 작업을 하는 화가들 사이에 직접 글을 쓰는 일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는데, 그때도 난 고집스럽기만 했다. 화가는 그리기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그런 유행이 다 지나버렸는데 이제야 나는 뒤늦게 그림책 글쓰기를 하고 있다.
고집스럽게 굴다가 글을 쓰면서 느끼는 재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불혹의 나이에 글을 붙들고 씨름하는 재미, 모처럼 무언가에 흠뻑 빠져 들어가는 재미다. 또 다른 하나는 글쓰기를 배워가면서 내 그림을 다시 보게 된 재미다. 애써 지은 글을 주저 없이 지워야 할 때마다 시골로 내려와 한동안 쩔쩔매며 복숭아 농사를 짓던 일이 스쳤다. 초봄에 가지치기를 하지 않고 예쁜 꽃들을 따내지 않으면 수많은 가지에 볼품없고 맛도 없는 개복숭아들만 다닥다닥 매달린다. 가지를 치고 너무 예뻐 따내기 아까운 꽃들을 따주어야만 여름에 탐스러운 복숭아를 맛있게 먹을 수 있다.
그림책 글쓰기를 하며 배운 가지치기는 그림을 대하는 마음도 다르게 가르친다. 빽빽이 채워가며 돋보이고 싶어 그려왔던 그림이 아니라 즐겁게 그리고, 수많은 가지치기를 하라고….
누구나 작업에 빠져 있을 때는 자기 작품이 마치 최고인 듯 느끼다가 막상 인쇄되어 그림책으로 나오면 벌거벗은 기분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기다리게 된다.
“그림은 좋은데 굳이 글까지….”
“글은 좋은데 그림이 예전만….”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던진다. 그때부터는 미처 보지 못했던 못난 곳, 모자란 곳들이 눈에 들어와 이랬었다면, 저랬었다면 하는 아쉬운 마음만 그득해지고, 한껏 부풀었던 기분은 밑으로 곤두박질쳐버린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꿋꿋하게 그림책 작업을 계속하는 까닭은 글과 그림이 어울려 있는 일이 바로 그림책이고, 어린이들이 내 그림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재밌는 일이기에 나는 아직 그림책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삶을 배워나가고 있다. 나를 지극하게 비워야 한다고….
박경진 동화 작가 겸 일러스트레이터
▼약력▼
1962년생.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그림책 작가로 활동 중이며 작품으로는 ‘대머리사막’ ‘봄이 오면’ ‘팥죽할멈과 호랑이’ ‘문제아’ 등이 있다.
구독
구독
구독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