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랍주조기법에 쓰이는 밀랍은 벌꿀찌꺼기로 성형이 잘 되고 잘 녹는 성질이 있어 정교한 문양과 거푸집을 만들기에 좋은 소재이다. 이 기법으로 작은 방울이나 향로 등은 만들 수 있었으나 높이 1m 이상이나 되는 큰 종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이제까지 한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다. 이 선림원종의 복원으로 하나밖에 없어 타종이 금지된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의 복제품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렸다.
지금까지 종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크기와 무게, 문양, 성분분석, 맥놀이 현상(음파의 두 파장이 겹쳐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현상) 등에 대한 기계적인 분석에 머물러 왔다. 그러나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겨레과학’이라는 기치 아래 우리의 물질 문화유산은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왜 만들고 고안해 냈는지, 각 제작공정과 소재 속에 담긴 선조들의 과학 슬기를 풀어내는 일에 열중해 왔다. 이번 선림원종의 복원연구에서도 지금까지 행해온 기계적인 분석을 뛰어넘어 장인의 손끝에서 우리 겨레과학기술의 ‘역사유전자’를 찾아 밝히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밀랍주조기술을 되살려 우리 종만이 갖고 있는 맥놀이를 띠는 완벽한 종을 복원해냈다.
이 과정에서 안과 밖의 거푸집 만들기, 합금제작, 공기와 불순물 제거하기, 기름 밀랍 송진 숯 새끼줄 등의 천연소재 활용, 도가니와 거푸집의 고른 열의 유지, 울음잡기 등 장인의 경험에서 우러난 과학슬기가 무궁무진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이 작업을 통해 연구진은 한 분야에서 수십 년간 선조들의 경험을 배워 갈고 닦으면서 ‘신의 경지’에 이른 두 분의 장인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왠지 모르게 선조들의 기술을 간직하고 진정한 물질문화유산의 정수를 탄생시킨 장인들을 과학기술자로 인식하는 데 인색하기 짝이 없다. 단지 오래된 유산쯤의 하나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첨단기술의 빛에 가려진 우리 고유의 소재나 기술, 산업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지 옻칠 잿물 조개가루 숯 등 가장 경험이 많은 기술일수록 복원에 실패할 확률이 가장 적고, 주변에서 가장 많이 써온 소재나 물질일수록 가장 부작용이 적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또 그 경험으로 응축된 기술이 한순간 되살아나면 그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최첨단 신기술과 신소재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과학과 산업, 기술을 총체적으로 인식하여 겨레과학의 진수를 몸에 담고 있는 장인과 모든 물질문화유산을 과학기술로 인식하는 폭넓은 역사인식을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겨레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의 폭과 첨단의 깊이는 비례한다.
정동찬 국립중앙과학관 과학기술사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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