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정각, 출발 신호가 대기를 크게 울린다. 영하로 뚝 떨어진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초청 선수들이 야생 짐승같이 질주해 나간다. 이어 마스터스 참가 선수들이 구름처럼 무리지어 뒤를 잇는다. 2만여 명의 선수들이 무리지어 달리는 모습은 장관이다. 내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가슴은 벅차오른다. 왜 나는 마라톤 경주를 볼 때마다 콧날이 시큰해지는 것일까. 내 DNA에는 저 원시 수렵 시대에 사냥감을 쫓아 달리던 본능이 각인되어 있다.
달리기는 인류가 잃어버린 원초의 본능 중 하나다. 나는 취재 차량에 동승해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는 행운을 얻었다. 레이스가 중반쯤 지나자 선두 그룹이 스무 명쯤으로 압축된다. 선두 그룹은 예상했던 대로 케냐와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공화국, 탄자니아 등에서 온 아프리카 선수들이다. 경험이 부족한 한국의 젊은 선수들은 14.3km 지점을 넘어설 때쯤 이미 선두그룹에서 떨어져 나가 보이지 않는다. 아쉬웠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은 더 빠른 속도로 신체를 이동할 수 있게 됐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기계에 의지한 이동이었다. 마라톤은 기계에 맡겼던 몸의 이동을 다시 몸에게로 되돌린다. 마라톤은 몸을 몸으로 쓰며 인간의 신체적 가능성의 극한을 탐색한다. 35km 지점을 지날 때 심장이 터질 듯한 공포를 체험한다. 그 극한을 넘어 달리는 자만이 완주의 영예를 얻는다. 근육들이 정교하게 협업 체제를 이루고 신체를 앞으로 밀어 움직이는 마라톤에서 나는 숭고한 느림의 미학을 발견한다. 달리는 자들은 아름답다.
치열한 선두경쟁을 벌이던 킵상이 타이스를 제치고 나갈 때 나는 다시 감동을 느낀다. 킵상의 몸은 균형과 절제미의 극치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저 균형과 절제의 밀도에서 힘과 속도가 발생한다. 마라톤 선수들은 인간이 고통의 임계점을 통과하며 얼마나 완벽하게 영혼으로 몸을 통어(統御)할 수 있는가를 보여 준다. 선수들은 고통에 겸허하게 순응하고 고통을 인내하는 법을 받아들인다. 마라톤은 선수들 사이의 순위를 다투는 경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몸 존재로서의 자기를 초극(超克)하는 운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42.195km를 완주하고 결승점을 통과한 뒤 기진해 쓰러지는 선수들의 몸은 그 자체가 정신적 사투의 결과여서 처절하면서도 숭고하다.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kafkaj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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