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병기]노동자의 敵은 노동자?

  • 입력 2005년 3월 17일 19시 01분


민주노총과 대기업 노조들은 작년부터 ‘비정규직 보호’를 내세우며 목소리를 높여 왔다. 다음 달로 예고된 총파업도 비정규직 보호를 명분으로 내걸고 있다.

하지만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근 내놓은 ‘한국경제 구조 변화와 고용 창출’이라는 보고서를 보면 대기업 노조와 민주노총의 이런 행동이 위선(僞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KDI는 방대한 데이터와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청년실업 및 비정규직 노동자 증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 확대의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로 대기업 노조와 공공부문의 노조를 지목했다.

비정규직 보호를 외치며 파업을 불사하는 정규직 노조가 정작 비정규직 노동자를 증가시키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물론 대기업 노조가 처음부터 ‘약자(弱者)의 빵을 빼앗겠다’고 의도해서 이런 구도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정년제가 흔들리자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싸워 온 결과가 사회 전체적으로는 이런 이상한 구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상당수 대기업 노조는 막강한 교섭력을 바탕으로 회사로부터 생산성을 초과하는 임금인상을 얻어 냈다. 각종 고용보호 장치도 만들었다. 그 결과는 대기업의 비용 상승으로 이어졌다.

대기업은 노조의 파업이 두려워 신입사원 채용을 꺼리면서 임금도 싸고 해고도 쉬운 비정규직을 늘리는 방법으로 이 문제에 대처했다. 늘어난 비용의 일부는 하청업체의 납품 단가를 깎는 방법으로 중소기업에 떠넘기기도 했다.

대기업 최고경영자와 공기업 사장들이 자신의 임기 중 큰소리가 나지 않도록 노조의 과도한 요구를 받아 주면서 이런 구도는 고착됐다. ‘노조는 무조건 약자’라는 국민의 인식도 한몫했다.

그 결과 대기업이 임금을 올리면 그 비용을 떠안은 하청업체는 자사 종업원의 임금을 올리기 힘들어졌다. 또 대기업의 지나친 고용안정은 청년 실업 심화로 이어졌다. ‘노동자의 적은 노동자’라는 말까지 나온다.

이런 구도는 이제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됐다. ‘사회적 강자’가 된 대기업 노조는 먼저 자신들의 몫을 나누는 모습을 보인 뒤 “약자를 배려하자”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이병기 경제부 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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