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어릿광대 같은 희극적 주인공 돈키호테에게서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 상황에 실존적으로 반응하는 인간의 비극적 한 단면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돈키호테의 희비극은 그의 시대착오적 기사(騎士) 편력에서 비롯된다. 몰락한 하급 귀족 출신으로 쉰을 넘긴 나이에 기사소설 읽기에 미쳐 있던 주인공이 마침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녹슨 투구와 갑옷, 낡은 창과 방패로 무장하고 몸소 편력 기사로 나서는 것이다.
출정은 세 번에 걸쳐 이어진다. 첫 출정은 혼자 떠나지만 두 번째 출정에는 우직한 농부 산초를 설득해 종자(從者)로 동반하고 나선다. 여기서 주인과 종자 사이에는 복고적 기사세계의 이상주의와 그것을 거부하는 현실주의가 간단없이 충돌하며 긴장과 유머를 빚어낸다.
대립하는 두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신의와 우정을 다하는 두 인물의 인간적 조화는 세르반테스가 엮어낸 휴머니즘의 정수라고 할 것이다. 마지막 출정에 나선 돈키호테는 마침내 백기사와의 결투에서 지고 귀향길에 올라 기사 편력을 마감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결말이 비극적인 것은 돈키호테에게 존재 이유의 상실을 뜻하는 것이요 실존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의 의미는 세 가지 관점에서 얘기할 수 있다. 우선 문학사적 관점에서 소설의 효시라는 의미를 지닌다. 17세기 전후 스페인 사회의 구체적 현실을 배경으로 연극을 비롯한 다양한 서사 장르의 주제와 형식을 실험적으로 종합한 것이다.
서사 시점을 다양화시켜 여러 일화와 인물과 행위를 일관된 구조와 플롯으로 교직(交織)해 내는 것, 대화를 통해 캐릭터를 창조해 내는 것, 인물들의 중층적 관점을 대비시켜 리얼리티를 증대시키는 것 등 세르반테스의 서사 형식에 대한 문제의식은 소설의 원형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키호테를 소설 중의 소설로 꼽게 되는 것이다.
또한 돈키호테는 이성적 사유 능력을 근간으로 하는 서구 근대사회의 인문주의적 인간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돈키호테의 맹목적 기사 편력은 산초의 합리적 이성에 대해 비이성적이지만, 윤리적 관점에서 정의를 가치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산초보다 이성적이다.
햄릿이 극단적으로 계산적인 개인주의 이성으로 번민하고 있다면 돈키호테는 개인주의적 합리성을 떠나 도덕적 이성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투르게네프는 진리와 허위,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햄릿과 견줄 때 돈키호테의 미덕은 무엇보다 도덕적 선의 의지를 투명하게 그려낸 데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같은 맥락에서 돈키호테는 서구의 종교개혁과 아메리카 진출, 그리고 과학의 발전과 인쇄술의 혁명 등 제반 사회변동 가운데 도래한 근대사회의 문화적 결실이라는 데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의미를 넘어 돈키호테의 고전적 가치는 무엇보다 시공을 초월해 되새겨지는 휴머니즘 정신에 있다. 그래서 웃음과 풍자로 17세기 스페인인들에게 유쾌한 지적 훈련의 동기를 제공했다면, 오늘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변함없는 유머와 해학으로 정보화 시대에 요구되는 자기반성과 성찰의 동기를 부여해 주고 있는 것이다.
김춘진 서울대 서어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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