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민족, 또는 민족주의 의식이 떠오른 것은 1876년 개항(開港)에서 1910년 한일강제합방(合邦)에 이르는 일제(日帝)의 식민화 과정에서였다. 따라서 우리의 민족주의란 생래적으로 방어적 저항적 또는 신화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없으니 민족으로 대신하자는, 몸은 빼앗겼어도 얼(정신·혼)만은 지켜야 한다는 ‘슬픈 민족주의’였다.
▼패전 60주년의 아이러니▼
저항민족주의의 구체적 발현인 1919년 3·1운동은 좌절됐다. 그 이듬해 ‘민족의 표현기관’을 자임하며 창간된 동아일보는 1924년 2월 6일자 ‘미(未)발견의 민중’이라는 1면 사설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조선인은 근년에 민족을 발견하였다. 민족을 발견함으로 여러 가지 민족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발견의 후(後)에 올 것은 조직인데 아직 우리에게는 민족적 조직이 없다. 우리는 이론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민족을 발견하였으나 구체적으로 민족을 조직하지 못했다. …민중을 발견함으로써 소수 선민(選民)이 아닌 민중의 힘으로써 민족의 발견이 의미를 갖게 해야 한다.”
민중이 민족의 주체가 돼야 한다는 것은 전제군주제에서 민주 공화제(共和制)를 지향하는 근대적 민족의식의 표출이었으나 국가 없는 민족의 현실에서 그것은 여전히 ‘슬픈 민족주의’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후반 프랑스혁명에서 배태된 유럽의 근대 민족주의는 평등과 자유, 합리의 계몽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잖아 배타적 국가주의로 변질됐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년)과 제2차 세계대전(1939∼45년)의 밑바닥에는 정치종교화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치즘과 파시즘은 그 극단적인 예다.
1853년 미국 페리 함대의 개국(開國) 압력에 굴복한 일본은 메이지(明治)유신으로 막부(幕府)체제가 붕괴되자 부국강병(富國强兵)의 국수주의로 치달았다. 제국신민(帝國臣民)을 ‘천황’ 아래 통합하고 충군애국(忠君愛國)으로 서구 열강(列强)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를 만들자는 일본식 민족주의였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95년)과 러-일전쟁(1904∼05년)의 승리로 급속히 열강의 대열에 편입했다. 그러나 일본의 민족주의는 민주화와의 결합을 포기함으로써 파멸적인 군국주의의 말로를 예비하고 있었다.
패전(敗戰) 60주년을 맞은 일본이 동북아시아 민족주의에 불을 댕기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보면 마치 역사가 반복되는 듯한 흐름이다. 한 세기 전 국제자본주의체제에 재빠르게 편입해 발흥했던 일본은 패전 후 미소(美蘇) 냉전의 양극 구도에서 미국의 보호 우산 아래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자 3, 4위를 다투는 군사 강국으로 부흥했다.
이제 미국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집권 자민당은 재무장을 위한 ‘평화헌법’ 개정은 물론 과거 침략전쟁의 실질적 책임자인 일왕(日王)을 다시 ‘국민통합의 중심’으로 세우려는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섬나라 근성’과 軍國 유전인자▼
일본이 한국과 중국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역사 왜곡을 고집하는 배경에 일본인 스스로도 인정하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섬나라 근성(根性)’과 ‘군국주의 유전인자’가 작용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일본을 위한 진정한 민족주의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왜곡된 민족주의는 결국 일본 국민 모두에게 화(禍)가 될 것이다. 그러나 과거사를 올바로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들 역시 피해자 아닌 가해자의 공동정범(共同正犯)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또한 ‘슬픈 민족주의’가 아닌가.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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