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권장도서 100권]<21>양철북-귄터 그라스

  • 입력 2005년 4월 25일 1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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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소설에 담아낼 수 있을까? 그것도 퀴퀴하고 끔찍하고 묵직한 야만적인 역사를?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은 이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세 살 생일날에 성장하기를 스스로 거부하고 양철북을 목에 매달고 다니며 두드리는 어린 아이 오스카가 몸으로 체현한 이야기 ‘양철북’은 바로 독일과 폴란드 국경의 자유도시 단치히(폴란드명 그단스크)의 역사이자 제2차 세계대전 전후사의 축소판이다.

본 것을 쓰는 데 가차 없는 어린이의 눈과 출생부터 정신 성장이 완결되어 세상사를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머리를 가진 주인공 오스카는 공식적 역사가 보여줄 수 없는 무대 뒤편의 삶, 탁자 밑의 부정한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조그만 양철북을 두드려 세상과 사회에 경종을 울릴 뿐만 아니라 날카로운 괴성으로 허울의 문명을 상징하는 유리와 창에 금이 가게 만들고 깨뜨려 부순다.

한 방화범이 밭을 매던 카슈바이 할머니의 네 겹 치마 속에 도망쳐 들어가면서 시작된, 정신병원에 수용된 오스카의 과거 회상은 당대 소시민들의 성(性), 부패, 나약함, 속물근성, 어이없는 끔찍한 죽음, 전쟁의 진행 등을 일상 속에서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다.

전후 독일사회의 주요 화두가 ‘과거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면 그라스의 ‘양철북’은 무기력하고 비굴하며 현실에 안주했던 당시의 소시민 사회에 초점을 맞추어 이 문제를 조명하고 있다.

소시민들은 더 이상 피해자도 아니고 수동적 가담자도 아닌, 자발적인 동참자로, 파시즘의 지지층으로 비판된다. 나치의 군악대 연주나, 무대 밑 오스카의 양철북 리듬이나 모두 아무 생각 없이 쫓아가는 군중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양철북’의 이야기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역사와 치밀하게 얽히면서―독일어로는 모두 ‘게쉬히테’라 표현되는―이야기와 역사가 서로 의미를 주고받는 형식으로 서술된다. 독일의 패배로 갑작스레 러시아 군인들이 밀려들어올 때 오스카가 내민 나치 당원 배지를 감출 데가 없어 마체라트가 결국 “당을 삼키고” 목을 찔린 채 러시아군이 쏘아댄 총탄을 맞고 죽는 장면은 그라스식 그로테스크와 반어, 풍자를 여실하게 대변하고 있다.

이 소설은 1959년 발표 당시에 극심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과거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전후 최대의 문제작이자 최고 작품이며 독일 소설의 한 절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99년, 20세기 마지막 노벨문학상을 받은 귄터 그라스는 현대 독일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로서 항상 시대의 문제(전후사, 68운동, 시민사회 문제, 통일문제, 여성문제 등)에 정면으로 맞서되 우리에게 익숙한 리얼리즘 기법이 아닌, 작가 특유의 양식(반어, 풍자, 환상, 알레고리 등)으로 밀도 있게 형상화하고 있다.

‘양철북’은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에 의하여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져 다시 한번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 영화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오스카상을 수상한 전후 독일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었다.

최윤영 서울대 교수·독어독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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