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크로노스를 몰아내고 세상을 삼분한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 숱한 모험담의 주인공이 된 헤라클레스와 테세우스, 황금 양털을 찾아 떠난 아르고 원정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을 타고난 오이디푸스, 바람보다 빠른 발로 구혼자들을 물리친 처녀 아탈란테, 선조 탄탈로스의 죗값으로 대를 이어 신들의 저주를 받은 아가멤논의 가문, 이름 없이 오래 살기보다 영웅으로 요절해 영원히 기억되기를 택한 아킬레우스, 트로이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채 분투하는 헥토르, 아내 페넬로페의 품에 안기기 위해 10년을 헤맨 오디세우스, 함락된 트로이를 등지고 이탈리아로 건너가 로마의 시조가 된 아이네이아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는 이 모든 인간들의 절박한 사연이 불멸하는 신들의 오만한 여유와 맞물려 살아 숨쉰다. 그 속에는 어려서 읽고 들은 모든 것과 그보다 더 많은 것이 담겨 있고, 어려서는 의식하지 못한 철학적인 사유와 사회문화적인 의미가 켜켜이 숨어 있다.
모든 신화가 그러하듯 그리스 로마 신화도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모습으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다. 천년 넘는 세월 동안 구전 시가와 문자화된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야기의 틀이 바뀌고, 모양새가 다듬어지고, 전에 없던 이야기가 보태지고, 이미 있던 이야기에 새 의미와 맥락이 부여되고, 워낙에 무관하던 이야기들 간에 전후 관계와 연관성이 확보되면서 느슨한 계보와 비교적 일관된 세계관을 지닌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군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공부하는 것은 그리스 로마 문학사 전체를 조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호메로스, 헤시오도스, 아이스킬로스, 핀다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같은 대시인들의 작품을 포함해 그리스 문명 태동기에서 로마 제국 쇠망기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르를 아우르며 서양 고전을 두루 섭렵해야 비로소 그리스 로마 신화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신화의 요람이 된 그리스 로마 사회의 문화적 지평을 체감할 수 있다.
그러나 고전 시인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찾아 읽을 여유를 갖기 힘든 대다수 독자들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는 한 권의 책으로 존재하고, 읽히고, 이해될 수밖에 없다.
요즘 우리 주위에는 유행이다 싶을 정도로 신화에 관한 책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원전에 충실하고 읽기 편하면서도 이야기의 재미가 살아있는 책을 두 권만 추천하라면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에디스 해밀턴의 ‘신화’와 토머스 불핀치의 ‘설화의 시대’를 꼽고 싶다. 두 책 다 ‘그리스 로마 신화’란 제목으로 우리말로 옮겨졌다. 최근 인기를 누린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또한 신화의 바다를 향해 처음 닻을 올린 모험가들에게 색다른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김현진 서울대 교수·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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