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난세의 격랑을 헤치고 겨레를 구한 충무공이 새삼 주목받는 것은 역시 경색된 한일관계 등 어지러운 외교안보 환경 때문일 것이다.
그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두며 “전투가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아 달라(戰方急 愼勿言我死)”라고 당부한 것은 지금도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이와 함께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역학관계를 보여주는 그의 마지막 일기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충무공이 숨지기 이틀 전인 11월 17일자 난중일기는 이렇다.
“어제 복병장인 발포 만호(萬戶) 소계남(蘇季男)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趙孝悅) 등이 왜의 중간 배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쫓아갔던 일을 보고했다. 왜적은 한산도에서 기슭을 타고 육지로 올라가 달아났고,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이었다.”
만호는 조선 시대 무관직의 하나이다. 삼도수군통제사였던 충무공은 왜적을 소탕한 부하가 전리품을 명군에게 빼앗긴 일이 한탄스러웠던 것 같다. 이런 일은 명나라가 원병을 보내면서 조선의 군령권을 행사했던 그때로선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충무공도 성품이 사나운 명나라 수군 도독(都督) 진린(陳璘)에게 자신의 전공(戰功)을 돌린 일이 있다.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진린이 조선 장수의 권한을 빼앗고 군사들을 학대할 것을 우려해 “이것을 제지하면 화를 더 낼 것이고, 그대로 두면 한정이 없을 것이니 순신(舜臣)의 군대가 어찌 패전을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했다. 스스로 나라를 지킬 힘이 없어 빚어진 설움이었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충무공은 노량해전에서 80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명나라 전선 300여 척과 연합함대를 이뤄 일본 전선 500여 척을 결정적으로 패퇴시켰다. 충무공의 뛰어난 지략이 빛난 전투였지만 수적으론 명나라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로부터 400여 년이 지난 현재의 한반도 주변 상황은 어떤가. 일본은 20세기 초 한반도를 35년간 강점한 데 이어 제2차 세계대전 패전 60년 만에 강대국으로 다시 부상했다. 병자호란을 일으켰던 중국 역시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일본과 동북아의 패권을 겨루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한국은 단 한번도 이들 국가와 맞설 만큼의 국력을 가져보지 못했다. 지금도 미국의 도움이 없으면 자력으로 나라를 지키기 어려운 게 현실 아닌가.
그럼에도 내부 싸움에만 골몰하고 국가의 내실을 다지는 데는 소홀한 정치권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대로라면 어느 세월에 중국 일본에 밀리지 않는 국력을 갖게 될지 알 수 없다.
광화문 사거리에 근엄한 표정으로 서 있는 충무공 동상이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지 못하는 후손들을 엄중히 꾸짖는 듯이 보인다.
한기흥 정치부 차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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