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이나 섬진강 언저리에서 살다보면 자주 보랏빛 노을을 보게 되는데 이는 대개 장마철에나 가능한 일이다. 빛의 굴절 현상인 노을은 거의 붉은 빛이지만,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곳 구례에서는 노을마저 붉은빛 보랏빛 연둣빛 등 색색이 다양하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직접 보지 않고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시방 구례군의 온 들녘이 보랏빛 꽃구름으로 뒤덮여 있다는 사실이다.
장미목 콩과의 두해살이 풀인 자운영은 4월 중순부터 모내기를 하기 전까지 누가 봐주지 않아도 묵묵히 꽃을 피운다. 보리처럼 늦가을에 발아한 뒤 일단 기나긴 겨울을 묵언으로 보낸다. 그리고 매화며 산수유 꽃이며 벚꽃들이 축제의 이름으로 화려한 날들을 다 보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온 들녘을 구름처럼 뒤덮는 것이다. 그러나 자운영은 죽어서도 천연의 녹비가 되어 벼를 키우고 그 벼가 우리들의 세 끼 밥상에 오르는 쌀이 된다.
몇 년 전만 해도 자운영 꽃밭을 보려면 경남 하동군 악양면의 평사리 들녘까지 가야 했다. 하지만 2년 전부터인가 구례군이 친환경농업의 일환으로 자운영 씨앗을 군 전체에 보급하면서부터 관광특구 구례군의 모든 들녘은 보랏빛 꽃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올해부터 그 절정을 이루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아침저녁으로 자운영 꽃밭을 산책한다. ‘구름 속의 산책’이 어디 영화 속만의 일이겠는가. 소설가 공선옥의 산문집 ‘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를 떠올리면서 생의 한 순간 이러한 절정도 없이 무슨 살맛이 나겠느냐며 약 올리듯 먼 곳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한다.
그렇다. 지금 구례 들녘은 축제가 끝난 뒤 비로소 ‘눈부신 한때’를 맞고 있는 것이다. 자운영은 밤새 치마를 뒤집어쓴 처녀처럼 꽃잎을 오므렸다가 농부들의 발소리 가까운 아침이면 다시 보랏빛 꽃구름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비로소 사라지는 것이다.
내년부터라도 ‘구례 군민의 날’을 즈음해 ‘자운영 축제’를 여는 것도 좋으리라. 그저 관광만을 위한 소비적인 축제가 아니라 농촌도 살리고 도시도 살리는 ‘도농 공동체’를 꿈꾸는 보랏빛 꽃구름의 축제, ‘생명의 축제’ 말이다.
단 한 마지기가 될지라도 자운영 꽃밭 하나하나를 도시의 가족들과 자매결연을 하도록 하고 마침내 꽃도 보고 그곳에서 나는 쌀도 먹게 하는 상생의 축제 말이다. 자운영의 어미는 섬진강이요, 그 아비는 지리산이다. 나는 시방 자운영 꽃밭을 빙빙 맴도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찬 건달 중의 건달이다.
이원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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