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1944)은 보르헤스 문학의 본령으로 간주되는 두 번째 단편집으로 그의 주된 관심사인 자아와 시간의 문제를 천착한 열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문고판으로 200쪽밖에 안 되는 적은 분량이지만 그의 철학적 문학적 사유가 온축된 이 작품집은 예기치 못한 폭발력으로 들뢰즈, 푸코, 데리다 등의 후기구조주의 사상가들과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을 비롯한 20세기 후반의 서구 지성계를 흔들었다.
이 책이 불러일으킨 지적 충격은 이성주의의 한계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소설을 무한한 사유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새로운 소설 문법의 창안에서 비롯됐다.
보르헤스는 새로운 세계 인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도발적 사유를 통해 탈근대 담론의 지적 경향을 선취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21세기 인문학 패러다임의 출발점에 위치시킨다.
철학과 문학의 경계적 글쓰기를 보여 주는 그의 픽션은 흔히 경험세계의 재현이 아니라 관념적인 허구의 세계를 다룬 ‘지적인 가설’로 여겨진다. 실제로 ‘픽션들’에 실린 많은 단편은 가상의 텍스트에 대한 주석으로서의 글쓰기라는 메타픽션적 성격을 지닌다.
‘픽션들’은 지배적 가치체계의 전복을 통해 세계의 질서를 재정의하고 글쓰기와 언어 자체에 대해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을 던진다는 점에서 환상문학의 형이상학적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초월과 무의미의 순수한 유희를 벌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질서로 파악해 온 상투화된 현실 개념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자기반성을 통해 경험 세계 너머로 인식의 지평을 넓힘으로써 더욱 심오하게 현실에 관여한다.
그러나 복잡한 추상과 심오한 형이상학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에게 관념 자체는 심미적 상상적 가능성만큼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형이상학 역시 ‘환상문학의 한 분파’이며 그것이 내세우는 객관진리라는 것도 실상 상상력의 산물로서 ‘우주에 대한 그럴싸한 묘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픽션들’에서 보르헤스는 이념적 테제가 아니라 철학의 존재 의미 자체를 회의케 하는 급진적인 유희성을 통해 글을 쓰고 있다.
따라서 미로, 도서관, 복권, 도플갱어, 꿈, 거울 같은 상징들은 우주의 본질적 무질서와 그에 대한 작가의 회의주의를 드러내는 존재론적 유희의 도구들로 아르헨티나 작가를 동반한 강박관념을 엿보게 한다.
‘픽션들’은 독자들에게 경이로운 문학 체험을 선사한다. 그러나 다양한 영역을 경쾌하게 넘나드는 보르헤스 특유의 현학성과 단 몇 줄의 글귀에 우주를 탁월하게 담아 내는 엄밀한 내적 논리는 책읽기의 즐거움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따라서 ‘픽션들’은 독자의 기대지평을 무너뜨리는 기발한 상상력의 유희와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웅숭깊은 철학적 사유 그리고 텍스트에 구현된 복잡한 미로 구조를 음미하며 한 구절 한 구절 천천히 읽어야 한다.
김현균 서울대 교수·서어서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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